본문: 요한복음 4장 15~26절
1. ‘사마리아 여인’과 ‘예수님’의 대화 속에는 ‘유다 사람들’과 ‘사마리아 사람들’ 사이에 매워질 수 없는 간격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 간격은 “우리가 제일 잘났다.”입니다. (‘사마리아 사람’=과거 ‘북이스라엘의 후손’, ‘유다 사람’=과거 ‘남유다의 후손’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사마리아 사람들’도 ‘여호와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그들 역시 스스로는 단 한번도 하나님을 버린 적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보다 자신들이 더 정통성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이유는 ‘그리심 산(20절의 “이 산”)’ 때문입니다. 게다가 ‘그리심 산’은 어떤 면에서 ‘이스라엘 민족 종교’의 정통성을 더 가지고 있었습니다. ‘신명기 27장’에서 축복을 선포한 곳이 ‘그리심 산’이기 때문입니다.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남유다 사람’들은 함께 성전을 건축하자는 ‘사마리아 사람들’의 요청을 거절했습니다. 이유는 ‘사마리아 사람들’이 이방인들과 결혼했다는 것 때문이었습니다.
결국, 사마리아 인들은 바사(페르시아) 제국을 무너뜨린 ‘알렉산더 대왕 시대’에 자신들을 위한 ‘성전’을 지었습니다. 그 성전은 BC 128년 유다의 하스모니안 왕조의 ‘요한 힐카누스(John Hyrcanus)에 의해 파괴되었지만, 여전히 그들은 그리심 산에서 제사와 예배를 드렸습니다.
2. 이 역사적인 배경 속에서 오늘 본문에 기록된 내용을 보면 예수님의 안타까움이 드러납니다. 21~24절의 말씀을 한마디로 정리한다면 “너희 둘 다 틀렸다.”입니다.
우리는 자꾸만 ‘사마리아’ 혹은 ‘우물가에서 만난 여인’을 ‘종교적’혹은 ‘도덕적’이유로 ‘뭔가 열등한 존재’로 여깁니다.
‘이방인과 결혼하여 피가 섞인 사람들’ 또는 ‘남편이 다섯 명이나 바뀐 부도덕한 여자’라는 식으로 색안경을 끼고 봅니다.
그렇게, 뭔가 도덕과 윤리에 기울어진 겸손과 섬김의 마음이 솟아오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도 복음을 전해야 한다.”라는 종교윤리적 결론에 도달합니다.
종교윤리적 우월감에서 출발하는 각종 종교행위 (전도, 섬김, 봉사 등)만큼 위험한 것이 없습니다. 그 행위를 통한 결과와 그 결과에 따른 칭찬과 칭송이 자아를 살찌우기 때문입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뿌듯함이 십자가에서 못 박힌 내 자아를 깨우기 때문입니다.
3. 우리는 ‘남편이 다섯 명이었다’는 이유로 발생하는 ‘사마리아 여인’에 대한 선입견을 버리고 말씀을 대해야 합니다. (당시 결혼 풍습과 그런 풍습을 이용하는 남자들의 악행도 생각해봐야 합니다. 함부로 그 여인의 직업, 상황, 환경 등을 추측해서는 안 됩니다.)
16~18절의 핵심은 ‘여인의 도덕성 판단’이 아닙니다. ‘모든 것을 아시는 예수님’입니다. ‘그 분을 만나면, 그 분 앞에서는 그 어떤 것도 감출 수 없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의 남편이 몇 명이었는지를 드러내셔서 수치심과 죄책감을 주시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29절도 참고하십시오. 이런 나를 만나주신 감격입니다.)
그런 여인의 마음 속에 감춰진 모든 것을 사랑의 눈으로 보고 계신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제 너의 진짜 주인, 진짜 구원자인 내 앞에 다 쏟아 놓고, 돌이키고, 치유 받고, 회복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너를 편견과 선입견으로 대하지만, 나는 너를 있는 그대로 본다. 본성과 죄성 속에 감춰진 깊은 두려움을 십자가 앞에 쏟아 놓아라. 그런 진정한 예배를 드리게 하기 위해 내가 십자가에서 너 대신 죽을 것이다. 십자가의 진리를 통해 회복된 영으로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마리아 여인과 예수님의 만남!의 핵심입니다.
4. 내 기준과 판단에서 상대방을 바라보는 선입견을 버리지 못하면, 나를 향한 십자가 은혜를 스스로 격하시키는 것이 됩니다. 아무 조건 없이 편견없이 나를 받아 주신 예수님의 사랑을 무시하는 것이 됩니다.
예수님은 모두를 향해 말씀하십니다. 성경에 기록된 모든 말씀은 나를 향한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골라서 여기저기 적용할 수 없습니다.
아침에 육신의 기지개를 켤 때, 내 속의 자아도 기지개를 켠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자아가 몸을 풀고 활동하기 전에 십자가에 못 박으십시오. “주님, 육신의 생명과 함께 고개를 드는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습니다. 이런 나를 대신해 못 박히신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엎드립니다!”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영과 진리로 예배한다”는 것은 바로, 이런 마음의 태도와 영혼의 자세로 예배 드리는 것을 말합니다. (물론,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에 관한 설명은 더 다양합니다.)
빛이신 예수님 앞에 내가 훤하게 다 드러난다는 것은 수치도 두려움도 아닙니다. 진정한 예배와 그 예배에 합당한 삶을 위한 시작이며, 과정이며, 결과입니다.
빛이신 예수님 앞에 숨겨놓은 모든 것이 드러나는 것! 드러남을 통해 치유하시고, 회복시키시는 것이 우리의 진정한 은혜와 능력인 줄 믿습니다!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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