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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진Hyung Yun

12월 9일 2021년 목요일 묵상

본문: 사사기 19장 22~30절


1. 제 속에 말씀 앞에서 도망치고 싶은 이상한 마음이 있습니다. 적당히 비난하고, 은근 슬쩍 넘어가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그 속을 까뒤집어 보면 혹시 모를 저의 잘못을 대비하려는 마음입니다. ‘그때 그렇게 말해 놓고 너도 똑같네.’라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은 간악한 마음이 있습니다.

어제 여러분의 눈을 마주하며 함께 ‘레위인의 이야기(17~19)’를 살펴볼 때, 죄송함(?)이 있었습니다. 정말이지 ‘저에게 가져와야 할 말씀의 잣대, 삶의 기준을 여러분에게 강요(?)하는 것이 아닐까.’라는 갈등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같은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시는 것 같아 감사할 뿐이었습니다.

어제 받은 은혜로 오늘을 살 수 없습니다. 어제 붙든 십자가로 오늘 마주하는 세상을 견딜 수 없습니다. 어제 주의 말씀에 순종했다고 오늘 순종할 수 있다는 착각에 빠지면 안 됩니다.

결정적인 사건은 오늘 본문에서 일어납니다. 레위인의 삶, 그가 쌓아온 삶의 결과에 불을 당기는 일이 오늘 본문에서 발생합니다. 레위인이 걸어온 삶의 결과가 쓰디쓴 열매로 돌아왔습니다.

지금까지 레위인은 괜찮을 줄 알았을 것입니다. 굳이 까다롭게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돌아보지 않아도 그럭저럭 원하는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도 아무일 없는 자신의 삶이 하나님 잘 섬기는 결과라고 착각했을 것입니다.


2. 그 레위인의 관점, 지독하게 종교성 익숙한 레위인의 시각에서 이 사건을 그려봅니다.

“이번 여행(?)에는 첩의 아버지의 예기치 못한 극진한 환대도 받았다. ‘역시, 레위인이 좋긴 좋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그래, 돌아가는 여정은 나름 율법도 지켜야겠다. 지금까지 줄곧 ‘내 소견에 옳음’을 따라 살았지만, 이번만큼은 ‘여부스(예루살렘)’가 이방인의 땅이라 들어가지 않는 기특한 종교 행위를 해야겠다.

아 뿌듯하다. ‘기브아’로 걸어가는 발걸음이 이렇게 가벼울 줄이야. 가벼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누군가 그랬던가?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삶에는 어려움이 있다고… 역시, 묵을 곳이 없구나. 베냐민 자손(기브아 사람)들은 나를 환대하지 않구나. 그것도 ‘레위인’인 나를 말입니다.

역시, 하나님은 도움의 손길을 예비하시는구나. 에브라임 출신의 한 노인이 여기 있을 줄이야. 그를 통해 이런 환대를 받다니(16~20절).

하지만, 이렇게 되면 뭔가 싱겁지… 못 돼먹은 기브아(베냐민)의 불량배가 나를 해하려고 몰려 들었구나. “그와 관계하리라(22절)”… 아, 그 옛날 소돔과 고모라에서 벌어진 일(창세기 19장)이 나에게 일어나고 있구나. 동성애에 빠진 저들의 악랄함을 보라.

한 노인, 정말 대단한 사람이야. 자신의 딸과 첩을 내주는 한이 있어도 레위인인 나를 지키려는 저 노인의 신앙을 보라. 내가 이대로 있어서는 안 되지. 그의 딸이 험한 꼴을 당하는 것 보다는 첩을 내 손으로 내주는 것이 낫지.”라는 마음으로 25절의 행동을 했을 것입니다.

자기 방어를 위한 성경해석이 이렇게 무섭습니다. 자기 의로움을 북돋우기 위한 성경해석이 이렇게 위험합니다.

성경을 읽을 때, 내 오염된 생각과 하나님 말씀이 부딪혀야 합니다. 그렇게 마침내 하나님의 말씀에 내가 굴복 당하는 것이 은혜입니다. 진짜 은혜입니다. 이 은혜를 맛보기 위해 성경을 펼쳐야 합니다. 그 은혜 앞에 무릎 꿇기 위해 무릎 꿇고 기도해야 합니다.

3. 하지만, 레위인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그동안 배운 말씀, 율법에 대한 지식이 말 그대로 지식으로 그쳤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굴복되기는커녕 오히려 자아를 살찌우는 사료에 불과 했습니다.

그리고, 자아를 죽이지 못한 말씀, 지식으로 머문 말씀, 그 성경 지식으로 행한 종교 행위의 익숙함으로 말할 수 없는 끔찍한 일을 저지릅니다.

네, 시체를 토막내는 짓을 벌입니다. 제물로 드려진 짐승의 사지를 자르던 레위인! 그렇게 익숙했던 칼솜씨로 상상하기도 힘든 짓을 저질렀습니다(29절).

(어쩌면 레위인에게 ‘레위기’는 짐승을 가장 효과적으로 도축하는 지침서 수준이었을 것입니다. 제사는 종교의 이름으로 행하는 도축행위의 실습장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더 황당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토막 난 시체, 썩어서 냄새나는 시체를 보고 광란의 전쟁을 벌인 이스라엘 민족들입니다.

30절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그들에게는 대체 어떤 일이 일어나지 말아야 했던 것인가? 모여서 무슨 일을 상의했던 것인가?”라는 답답함이 가득한 질문을 해봅니다.

(그 지경까지 다다른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회개 혹은 자기 반성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바보 같은 일인지도 모릅니다.)

4. 다음날 아침, 사람이라면 한번은 생각했어야 합니다.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한 거지?”라고 말입니다. 자신이 대체 무슨 짓을 했는지… 내가 걸어온 삶의 자취와 그로 인해 맞이한 결과가 무엇인지 한번이라도 생각했다면, 거기서 멈췄을 것입니다.

지금 눈 앞에 엎드러진 자신의 첩을 바라보며 올라오는 순간의 감정에 휩싸이면 안 됩니다! 당장 벌어진 상황을 보며 감정의 폭탄, 분노의 폭탄을 터뜨리면 안 됩니다. 그러면 뇌관이 됩니다. 거기서 멈추지 못하고, 더 큰 폭탄을 터뜨리는 뇌관이 됩니다. 네, 분노에 가득한 레위인의 행동은 ‘이스라엘 전체’와 ‘베냐민 지파’ 사이의 끔찍한 전쟁의 뇌관이 됐습니다.

레위인… 첩의 사망 앞에서 칼을 들고 그 시체를 자를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칼로 자기 심령을 갈랐어야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첩의 조각난 시신을 보면서 ‘대체 우리가 어디로 가고 있는가?’라는 영적 충격을 받았어야 했습니다.

우리 모두의 손에는 저마다의 칼이 있습니다. 그 칼끝이 향하는 방향이 어디인지 또 점검해야 합니다. 손에서 내려놓으면 제일 좋습니다. 칼집에 넣으면 그나마 다행입니다.

우리의 인생이 칼솜씨를 뽐내는 삶이 아니라, 십자가에 못박힘이 드러나는 삶이 되길 축원합니다.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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