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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진Hyung Yun

12월 7일 2021년 화요일 묵상

본문: 사사기 19장 1~10절


1. 삼손의 죽음 이후 더 이상 읽고 싶지 않은 이야기가 전개 됩니다. 사사기 마지막에 등장하는 큰 두 사건은 충격과 경악이라는 말로도 표현이 되지 않습니다.

17~18장에 등장하는 ‘레위인 제사장’과 ‘미가(Micah)의 집안’, ‘단 지파’의 이야기… 그 어지럽고 얽히고설킨 이야기… 종교가 인간의 이익과 탐욕에 어떻게 이용되며, 그런 인간을 그럴 듯하게 포장하는 도구로 이용되는 극명한 예입니다.

19~21장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더 극악한 이야기입니다. 생각하기도 싫고, 입에 담기 조차 힘든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사사기는 마무리됩니다. 그러나, 펼쳐 읽기조차 어려운 이 이야기를 냉정하게 봐야 합니다. 오히려 더 읽어야 합니다.

이런 이야기를 읽을 때, 가장 어리석은 태도가 ‘그 사람 혹은 그 교회(공동체)’가 떠오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절대 그러지 않을 거다.’라는 자기 확신입니다.


2. 하나님 앞에 겸허함, 십자가 앞에 낮아짐, 말씀 앞에 겸손함이라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나는 신앙이 좋은 사람이니까 겸손해야만 해.’가 아닙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겸손’은 ‘나 스스로 그렇게 행동하고, 마음 가짐을 가지는 것’에서 출발하지 않습니다.

도저히 겸손할 수 없는 자기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런 나에게 유일한 소망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것임을 아는 것입니다.

아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내 안에 예수님이 사시는 능력! 그 믿음을 붙들고 또 십자가 앞에 엎드리는 것입니다.


3. 하나님께서 베푸신 대속의 은혜에 붙들리지 않으면! 여호와 하나님의 그 은혜 언약 안에 머물지 않으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못 박히지 않으면, 종교화 됩니다.

생명 그 자체이신 하나님을 인간이 생각하는 신적 존재 수준으로 인식합니다. 하나님께서 그토록 싫어하는 우상을 숭배하듯 하나님을 숭배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종교 상징 혹은 종교 부적 수준으로 이해합니다. 성경이 지향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종교 교리의 핵심, 구원받는 묘책, 천국 입성 티켓으로 착각합니다.

‘미가의 집’, 거기서 ‘레위인 제사장’이 행하던 종교행위… ‘단 지파’가 원했던 종교행위… 모두가 같습니다. 같은 내면의 상태, 같은 외적 형태였습니다. 좋은 의미가 아닙니다.

내면의 상태는 썩었습니다. 아니, 죽었습니다. 완전히 썩어 냄새나는 송장의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겉으로 드러난 종교행위는 거룩했습니다. 거창했습니다. 있을 것 다 있었습니다.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이것저것 만들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드러나는 도덕적 결함은 없었습니다. ‘레위인 제사장’은 여기 저기 옮겨 다니며, 열심히 종교행위를 집례했습니다. ‘미가의 집안’도 ‘단 지파’도 참 열심히 그 제사장과 함께 종교 생활했습니다. ‘단 지파’는 마침내 떠돌이 생활을 마쳤습니다. 그럴 듯한 땅도 얻었습니다. 정착했습니다.

이런 생각도 해봤습니다. ‘라이스’에 자리를 잡았을 때, 정착을 감사하는 제사를 성대하게 드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무 말씀 안 하십니다. 사사기의 기록은 그냥 담담하게 있는 사실만 서술합니다. (31절을 가만히 다시 읽어보십시오. 이 속에 그들의 행위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이 있습니다.)


4. 그렇게 19장의 이야기는 다시 ‘레위 사람’으로 이어집니다. (오늘 본문이 19장이지만, 18장의 내용을 좀 더 다뤘습니다. 수요예배 때 함께 좀더 깊이 묵상하고, 기도하고 싶습니다.)

겉으로는 아무 문제 없는 듯 해 보인 그들입니다. 멀리서 바라본 사람들은 “아이고, 단 지파, 이제야 정신차렸네. 이제야 좀 제대로 하네. 역시 제사장 모시고, 열심히 하니까 되네.”이렇게 말했을 지 모릅니다.

제가 다른 지파 사람들이라도 겉으로 드러난 그들의 행동, 그들의 모습을 보면 ‘잘한다. 좋다’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좋은 것(good)일 뿐 옳은 것(right)은 아닙니다.

(좀 곁길 같지만, ‘좋은 것’을 위해 ‘옳은 것’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좋은 것’을 택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옳은 것’은 아무나 택할 수 없습니다.

‘옳은 것’을 택한다는 것은 ‘좋은 것’을 보장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한, ‘가지고 싶지 않은 십자가, 가질 수 없는 믿음’을 택하는 것과 같습니다.)

17~18장에 나오는 ‘미가, 레위 제사장, 단 지파 사람들’은 ‘좋은 것’을 택했습니다. ‘옳은 것’이 아닙니다.

‘좋은 것’만 택하는 삶의 결과가 이제 터진 겁니다. 19장 이하의 ‘레위인’에서 터진 겁니다. 18장까지는 그럭저럭 괜찮아 보이다가… 결국 19장에 처참한 결과물이 나타난 것입니다.

‘레위인’이 첩을 가졌다는 것을 단순하게 ‘음란’이라는 틀에서 해석하면 놓치는 것이 너무 많습니다. 인간의 양심과 도덕심, 현대의 가치관과 법체계 속에서 허용되지 않는 ‘음란’을 저지르지 않는 사람들은 ‘비난(남에 대한)’과 ‘안심(‘난 절대 그러지 않아’라는 스스로에 대한 안심)’으로 이 본문을 봅니다.

겉으로 드러난 것은 ‘음란’이지만, ‘레위인’의 첫 출발은 ‘좋은 것’입니다. 나의 만족을 위해 ‘좋은 것’을 택한 것입니다. 방치한 ‘좋은 것’이 ‘음란(두 마음, 두 주인 섬김)’으로 굳어졌습니다. 그리고 그 굳어버린 마음, 그 삶의 결과가 끔찍한 삶의 결과로 나타난 것입니다.

선택의 순간, 선택의 갈림길에서 항상 ‘옳은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옳은 것’을 택하기 위해 십자가를 묵상하고, 십자가를 바라보며, 십자가에 못 박힌 저와 여러분 되시길 축원합니다.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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