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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진Hyung Yun

12월 29일 2021년 수요일 묵상

본문: 골로새서 3장 12~4장 1절


1. 본문 12절의 “그러므로”를 시작으로 ‘골로새서’의 결론으로 접어듭니다. ‘옛 사람(자아)’을 벗고, ‘새 사람(예수 그리스도)’을 입은 사람의 삶에 대해 더 구체적으로 말합니다.

그런데, 이런 벽 앞에 서게 됩니다. 읽을 때는 다 맞는 말이고, 다 옳은 말이고,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을 압니다.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 이렇게 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여기서 또 문제가 있습니다. 말 그대로 생각만 들지 그렇게 행하지는 않는 내 모습이 보입니다. 이유는 하나입니다. 내 안에 하나님 말씀대로 살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능력은 고사하고 마음조차 없기 때문입니다.

어설픈 도덕과 윤리로 하나님 말씀을 대하는 것처럼 위험한 것이 없습니다. 뻔히 안 되면서… 몇 가지 드러난 행위를 가지고… 스스로 괜찮은 존재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것이 없습니다.

2. 오늘 말씀도 가만히 읽어보십시오. 크게 세가지 반응일 것입니다. 첫째는 그냥 읽습니다. ‘그렇게 해야겠다… 그렇게 하면 좋지…’라는 생각만 들 뿐입니다. 그때 잠깐 감동(?)비슷한, 의지(?) 비슷한 느낌만 들고 흐지부지 끝입니다. 대부분 그렇게 하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통렬한 반성이 없습니다. 십자가 앞에서 자신을 내놓는 회개가 없습니다.

두번째는 이 말씀들 중에서 자신에게 해당되는 몇 가지를 골라냅니다. 그리고 스스로 기특하게 생각합니다. 물론, 자신이 행한다고 생각하는 이런저런 ‘좋은 행함’도 선택적입니다. 나와 관계가 좋은 사람에게 그렇게 합니다. 그렇지 못한 경우는 외면하거나, 그냥 무관심합니다. 흔히 말하는 ‘하나님께 맡겨 드림’으로 빠져나갑니다.

세번째는 기록된 말씀대로 행하지 못하는, 행하지 않는 어떤 대상(인물)이 떠오릅니다. (가장 안타까운 경우입니다.) 특히 18절 이하를 읽으면서 ‘누가 먼저?’혹은 ‘네가 말씀대로 해봐라 나도 말씀대로 반응한다’라는 생각이 올라옵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내가 먼저’라는 마음이 솟아난다면! 진짜 은혜입니다. 감사입니다. 다행입니다.)


3. 우리는 항상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말씀 앞에서 서둘러(?) 행하려는 인간의 도덕성, 그 본능을 십자가 앞에 내려놓는 것입니다. (물론, 도덕성조차 없거나 희박한 경우는 너무 심각한 상태입니다.)

범죄타락한 인간은 도덕과 윤리적 행위 마저도 자신의 의로움과 자아실현을 위해 행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인간 타락(선악과 사건)은 도덕과 윤리가 말하는 불순종 혹은 비도덕적 행위가 아닙니다. 그 행위의 끝에는 ‘자아실현’이 있습니다. ‘주인 되신 하나님, 생명 되신 하나님을 버리고 자기 스스로 주인 되는 것’을 택한 ‘자아실현’이 인간 타락의 근본입니다.


4. 본문 설명은 하지 않고, 이렇게 말씀 드린 이유가 있습니다. 본문이 이해가 안 되는 것이 아니라, 이 본문을 대하는 우리의 마음 상태가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경우 오늘 말씀, 그 중에서도 18절 이하를 보면서 상대방이 먼저 말씀대로 행해주기를 바라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상대방이 그렇게 해주면 나도 그렇게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물론, 반대라면 정말 다행입니다. 대신 나만 일방적으로 말씀에 순종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솔직한 반응 아닐까요? 그렇다면, 방법은 무엇입니까? 어떻게 해야 합니까? 네, 가장 먼저 어설프게 행하려는 마음을 잠시 내려놓아야 합니다. (하지 말라는 뜻이 절대 아닙니다. 잠시 내려놓는 것을 핑계 삼아 마음 깊은 곳에 자리 잡은 ‘하고 싶지 않는 자기 본성’을 감춰서도 안 됩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온전하신 마음, 그분의 마음이 없는 나를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합니다. 가장 근본적으로는 ‘남편에게 복종하고 싶지 않은 내 마음! 아내를 괴롭게 한 나! 부모에게 순종하지 못한 나! 자녀를 나의 소유로 생각한 나! 성실함 없이 일한 나! 자신의 이익만 생각한 나! 등등(3장18~4장 1절)’ 이런 자신의 모습이 말씀 앞에 그대로 다 드러나야 합니다. 12~13절에 기록된 말씀대로 도저히 행할 수 없는 내 자신이 부끄럽고, 절망스럽기까지 해야 합니다.


5. 그래야, 죽을 것처럼 십자가를 붙들게 됩니다. 자아의 어떠함에 기울어진 내 존재를 십자가에 꽁꽁 묶으려 합니다. 도덕적 행위 마저도 자아를 살찌우는 먹이로 이용하는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게 됩니다. 그 묶임과 못 박힘이 진정한 기쁨으로 다가옵니다.

그것이 14절입니다. 참 헷갈리기 쉬운 ‘사랑’이라는 단어가 12~13절의 모든 행위를 하도록 만드는 비결(?) 혹은 작품을 완성하는 마지막 조각(?)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여기에서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말합니다. 그 분의 십자가를 사랑하는 것! 감정(?)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분의 십자가를 절대로 사랑할 수 없는 내가 ‘나보다 나를 더 사랑하셔서 나 대신 죽으신 사랑’에 이끌려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는 것’까지 연결되는 것입니다.

12절도 마찬가지입니다. 반복해서 가만히 읽어보십시오.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처럼…”은 ‘저와 여러분’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가장 먼저 예수님 입니다. 우리는 예수님 때문에 하나님의 택함, 거룩함, 사랑 받음을 입은 자들입니다.

원문에서는 ‘입다’라는 뜻의 ‘enduo’가 먼저 나옵니다. 즉, “너희는 입어라”가 문장 처음에 나옵니다. 그러니까 직역하면 “너희는 (옷) 입어라,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받은 자처럼.” 이렇게 됩니다.

옷 입어야 하는 이유는 한가지입니다. 내 안에 그런 성품(긍휼, 자비, 겸손, 온유, 오래 참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12절의 성품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가장 먼저 이런 나를 인정하며 십자가 앞에 엎드려, 십자가에 붙들리기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그렇게 십자가에 못 박혀 내가 죽을 때, 내가 죽은 그 자리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십니다. 그 분으로 옷 입혀져 나도 모르게 그 성품이 드러납니다.

저와 여러분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이 덧 입혀진 줄 믿고 말씀에 대한 진정한 순종, 기쁨의 순종으로 살아 가시길 축원합니다.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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