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시편 42편 1~11절
1. 시편 42편은 찬양의 가사로 참 익숙한 시편입니다. 1절은 찬양 가사에 거의 직접 사용합니다. 물을 찾지 못해 목이 마른 사슴의 이미지를 사용했습니다. 갈증이 더한 만큼 물에 대한 간절함을 이스라엘의 자연환경과 사슴이라는 동물의 이미지를 통해 하나님을 향한 갈급함을 잘 표현한 것입니다.
사슴에 대한 것을 부연설명을 드리면, 여기서 말하는 ‘사슴(히브리어: ayal)’은 연약한 이미지가 아닙니다. 강인한 수사슴입니다. 겉으로 도도해 보이고, 강인해 보이지만 오랜 갈증에 헐떡이는 수사슴이 떠올라야 합니다. (“갈급함”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arag’는 ‘헐떡임’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원어의 뜻에 더 가깝습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겉으로 대단해 보여도, 다 갖춘 것 같아도 ‘하나님의 은혜, 십자가에서 흐르는 생명수’에 영혼을 축이지 못하면 ‘시냇물을 찾아 헐떡이는 수사슴’과 다를 바 없습니다. 아무리, 세상 것으로 자신의 영혼을 채우려 발버둥 치지만, 결국 ‘헐떡이는 수사슴의 처지’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1~2절은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궁극적 결핍과 그 해결에 대한 강렬한 메시지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갈망’은 ‘하나님의 얼굴 비추심, 은혜 내려주심’으로만 가능하다는 것을 가장 사실적이고, 확실한 비유를 통해 읽는 이들의 마음에 심어주고 있습니다.
2. 그런데, 3절 이하에서 분위기가 달라집니다. ‘오직 하나님을 향한 영혼의 갈망과 그 분의 은혜’만을 간구하며 살아가는 사람에 대한 주변의 반응이 어떻습니까? 성도를 향한 대체적인 세상의 반응이 어떠합니까? 네, 부정적입니다. 이것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닙니다.
3절의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라는 것은 비웃음입니다. 비아냥거리는 것입니다. 이런 세상의 냉소와 비난에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라고 시인이 말합니다. 억울함, 속상함, 답답함이 섞인 반응일 것입니다.
언제나 그렇듯이 여기서 멈추면 안 됩니다. 여기서 적용을 잘못 확대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 나를 비방하는 저들! 하나님의 선한 백성을 비방하는 저들!에게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보여주시옵소서. 저를 비방하는 것이 하나님을 비방하는 것입니다. 제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능력이 드러나게 하시고, 갚아주시옵소서. 저들의 입을 막아주시옵소서!”라는 식의 ‘거룩한(?) 복수’로 포장하지 말아야 합니다.
3. 이 말씀에서 곰곰이 생각해볼 것이 있습니다. “왜, 사람들이 나를 향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라고 말했을까?”입니다. 단순히 말하면, 불신자들의 비아냥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비방을 받을 수밖에 없는 삶을 살았다면 어떻게 합니까? 성도의 삶, 하나님 말씀에 합당한 삶을 살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비난을 받았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만약, 그렇다면 빨리 돌이켜야 합니다. 정리해야 합니다. 털어내야 합니다. “비록, 당신은 연약하지만, 결국 돌이키는 당신을 보니, 하나님이 살아계시는 것을 알겠습니다. 십자가의 능력이 무엇인지, 그 은혜가 무엇인지 알 것 같습니다.”라는 반응이 나오도록 ‘십자가 은혜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전체를 다시 묵상하시면서 5절에 집중해보십시오. “왜, 자기 영혼에게… 낙심하고, 불안해하는 자기 자신에게 선포를 했을까?”입니다.
시인은 분명 어떤 어려운 상황, 불안한 상황, 낙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맞이했을 것입니다. 그것이 질병(41편과 연결하면…)인지, 대적의 공격(10절)인지, 경제적 어려움인지, 관계의 문제인지, 자연재해인지, 아니면 모두 다 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 일, 사건, 상황, 환경 앞에 시인은 낙심, 낙담, 낙망, 불안, 공포에 휩싸여 있었습니다.
이런 모습을 본 주변 사람들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입니다.
저는 3절이 단순하나 비난, 비아냥으로 보이지 않았습니다. 좋은 의미의 의아함으로 보였습니다. “당신이 그렇게 붙들었던 하나님이 살아계시지 않습니까? 하나님만이 유일한 소망이며, 환란 중에 도우심이라고 당신이 말했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그렇게 낙심합니까? 불안해합니까?”라며 고개를 갸우뚱 거리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이것이 건강한 신앙인의 자세입니다. 내게 닥친 상황이 억울한 것이 아니라, ‘내게 왜 이런 일이…’라는 반응이 아니라, “이 황망한 상황에도 주님은 여전히 나의 소망이십니다. 하나님께 피하고, 하나님을 의지할 때 주님이 내 영혼을 다시 일으켜 세우실 줄 믿고 나갑니다. 그렇게 오늘도 허락된 내 삶을 기쁨으로 살아내겠습니다!”라는 믿음의 고백과 삶의 발자국을 내디뎌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참 어려운 시간을 버틴 뒤, 새로운 한 해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장미 빛 꿈을 꾸기 보다 닥쳐올 어떤 상황에도 믿음으로 5절의 선포를 하며 뚜벅뚜벅 한 걸음을 걷겠다는 믿음의 자세를 다져봅니다.
척박한 광야에서 한 발자국을 옮기며 내 영혼을 소생시킬, 내 영혼의 갈급함을 채우실 유일한 생명이신 예수님으로 인해 다시 일어서는 저와 여러분 되길 축원합니다!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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