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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진Hyung Yun

12월 24일 2020년 목요일 묵상

본문: 베드로후서 2장 10~22절


1. 거짓교사들에 대한 베드로 사도의 경고, 안타까운 꾸짖음, 그들의 정체에 대한 설명이 계속 이어집니다. 그들이 가르치고, 행하는 것들은 ‘주관하는 이(삼위일체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임을 다시 강조합니다.

10절의 “육체를 따라 더러운 정욕 가운데 행하며…”는 ‘통상적인 음란한 행위’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자신의 욕망, 욕구, 원함, 바람, 계획 등을 이루는 도구로 여기는 모든 것을 포함합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결혼이라는 테두리를 벗어난 남녀 간의 관계보다 더 교묘한 음란은 ‘하나님의 비전, 축복, 사명 등’으로 포장하여 ‘자아실현’을 하려는 ‘자아숭배의 음란’입니다. 하나님을 이용해 하나님이 아닌, 자기를 섬기는 음란을 행하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으로 ‘거짓교사들’에 관한 기록을 읽는다면 타인을 향한 마음의 손가락질을 거둬들이게 될 것입니다.

네, 어제 오늘 읽으신 말씀은 거짓교사들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라, 복음을 악용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이야기입니다.


2. 우리의 삶을 돌아보면 얼마나 자긍하며 살았습니까? 또 자긍하고 싶어 하나님에게 이런 저런 것을 채워 달라고 기도했습니까? 그렇게 그토록 원하던 것을 얻으면 자긍하고, 자만하고, 으스대지 않았습니까? 반대로 바라고 원하던 것을 얻지 못하면 원망하고, 자기비하하고, 억울해 하지 않았습니까?

심지어, 성경 많이 읽은 것, 기도 많이 하는 것, 성령 받은 것, 은사 받은 것 등등도 종교 자만심을 충족하기 위한 것으로 착각했습니다.

우리는 정말 조심해야 합니다. 종교심을 부추기기 위한 ‘종교행위’를 분별해야 합니다. 종교윤리 혹은 도덕이 자기도 모르게 ‘은밀한 교만’에 빠지게 만든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3.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를 안다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베푸신 대속의 은혜가 무엇인지 안다면 범죄함으로도 표현이 안 되는 패역한 나, 하나님을 떠나 영원한 멸망을 향하던 나를 십자가에 못 박을 수 밖에 없습니다. 이런 나 대신 죽으신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는 것이 최고의 감사이며, 축복이라는 것을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21절의 ‘의(義)의 도(道)를 안다’는 것이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의로움으로 인정하시는 도(道, 길)는 ‘십자가의 대속의 제물되신 예수님, 그 분이 완성하신 십자가 진리’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의의 도를 안다’는 것은 결코 종교지식을 아는 것이 아닙니다. 내 전인격과 삶이 십자가에 못박힌 실존적 경험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과거형으로 끝난 것이 아닙니다. 여전히 현재이며, 또 미래입니다.

우리가 인정해야 할 것은 오늘날 교회와 기독교는 안타깝게도 십자가에 자아가 못 박힌 실존적 경험보다 십자가를 종교지식으로 아는 것이 일반화되어 있습니다.

각 개인이 십자가 앞에 나아가 갈등과 고뇌하는 시간을 오히려 교회가 빼앗는 것 같은 형태가 되어버렸습니다. 한 사람, 한사람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실제로 바라볼 기회를 빼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대신 교회의 프로그램, 유명 목사의 설교, 베스트셀러 기독서적이 그려준 예수님을 감상하는 종교 박람회, 전시회를 기웃거리게 하는지도 모릅니다.

이런 식으로 예수님과 그 분의 십자가를 아는 것은 모르니 만 못합니다. 21절의 말처럼 “알지 못하는 것이 도리어 그들에게 나으니라”와 일맥상통합니다.

거짓교사들은 이방종교인들이 당시 유행?하던 예수님의 십자가 스토리를 살짝 섞어서 가르치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즉, 외부에서 유입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대부분 초대교회 내부에서 나타난 것이 거짓교사였습니다.

초기 거짓 교사들은 구약의 율법과 유대교적 배경이었습니다. 후기 거짓 교사들은 교회 안에 있던 사람들 중에서 이방 종교와 사상을 섞어서 초대교회 신자들을 속였습니다.

4. ‘이단(異端)’의 한자 뜻을 아실 것입니다. ‘다를 이(異)’, ‘끝 단(端)’입니다. 처음은 같은 듯 보이나, 마지막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처음에 십자가 대속의 은혜, 죄인을 구원하신 그 은혜에 부딪혀 예수님을 믿었습니까? 그러면 끝까지 그래야 합니다. 끝까지 십자가만 생각해야 합니다. 만약, 마지막이 다르다면, 결국 원한 것이 땅의 축복과 번영, 죽어서도 축복과 번영이라면… ‘이단, 거짓교사’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 분의 영광, 놀라움, 아름다우심은 십자가 때문입니다. 다른 것들은 부스러기일 뿐입니다. 그 아름다우신 예수님 앞에 서기 위해 다시, 또 십자가를 붙드시길 축원합니다!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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