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빌레몬서 1장 17~25절
1. 사도 바울의 가장 짧은 편지로 알려진 ‘빌레몬서’입니다. 그러나, ‘골로새서’와 깊은 연관이 있다는 것을 생각해본다면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 학자들은 ‘빌레몬서’는 ‘골로새서’와 함께 ‘오네시모’와 ‘두기고(골로새서 4장 7절)’에 의해 ‘골로새 교회’에 전달된 것으로 봅니다.
시간을 내어 ‘골로새서’를 읽어보십시오. 고개가 끄덕여질 겁니다. 두 편지의 연관성이 깊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내일부터 ‘골로새서’를 묵상합니다.)
2. 사도 바울은 ‘빌레몬’이 ‘오네시모’를 용서하고, 용납하고, 동역자로 받아들일 것을 말할 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에 빚진 자의 마음으로 그렇게 하라고 권면합니다. 십자가의 피로 하나님과 화평을 이루었음을 강조합니다. 그 내용이 ‘골로새서 1장 14~22절’에 등장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오네시모, 빌레몬, 사도 바울…)가 옛사람의 모습을 벗고, 새사람을 입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이제는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차별이 없다고 말합니다. 네, ‘골로새서 3장 9~11절’에 등장합니다.
제가 큰 것만 말씀드렸습니다. 읽어 보시면, ‘빌레몬서’는 ‘골로새서’의 축약판이자, 실제적 적용, 삶에서 각 개인이 어떻게 적용해야 하는지를 기록한 것입니다.
3. 이런 맹랑한 생각을 해봤습니다. “과연, ‘골로새서’를 누가 읽었을까? ‘오네시모’였을까? 그렇다면, ‘오네시모’의 목소리로 들려지는 ‘골로새서’의 내용이 ‘빌레몬’의 귀에 들렸을까? 아무리 나의 스승 ‘바울’이 기록한 친필 편지라고 해도 그게 마음에 울렸을까? ‘오네시모’가 읽지 않았다고 해도 그를 본 상태에서, 그 껄끄러운 마음을 때문에 ‘골로새서’의 내용이 제대로 들렸을까?”라는 생각 말입니다. (안 해보셨다면, 지금이라도 해보십시오.)
4. ‘골로새서’의 낭독이 끝났습니다. 모두에게 ‘골로새서’의 여운이 가시지 않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 ‘빌레몬’은 마음이 복잡합니다. 내면의 갈등, 스치는 생각 등등으로 집중하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빌레몬’은 위대한 신앙인이기에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하셔도 좋습니다. 그런데, 이번엔 딱 제 수준의 묵상을 한번 고려해주십시오.)
그런데, 갑자기 ‘오네시모’가 다가옵니다. 도망친 노예! 나에게 분노를 일으키게 한 장본인! 당장 잡아 다가 뭇매를 가하고 싶은 걸 겨우겨우 참고 있는데, 그가 다가왔습니다.
분을 삭이며, 시선을 피하기 위해 고개를 숙이자 그의 손에 들린 편지가 눈에 들어옵니다. 편지를 만지작거리는 ‘오네시모’의 손은 아련하게 떨립니다. ‘빌레몬’은 자기도 모르는 힘에 이끌려 손을 펴 그 편지를 받았을 것입니다.
편지가 전달되는 순간(이쪽에서 저쪽으로 편지가 옮겨가는 순간)은 영화 속 ‘슬로우 비디오’의 한 장면 같았을 것입니다.
5. 자신의 감정이 들킬까 이내 고개를 숙여 읽기 시작한 편지 딱 한 사람, 나 빌레몬에게 써 보낸 것이었습니다.
그 편지를 읽으며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무엇이었을까요? 지금 ‘사도 바울’, 아니 ‘성령 하나님’께서 내 마음을 위로하고, 만지고 계신다는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오네시모’를 향한 내 감정… 내가 기억하고, 내가 가지고 있는 ‘오네시모’에 대한 마음의 상태 때문에 ‘골로새서’를 듣지 못하는 나… 십자가 복음에 빚진 자의 마음을 붙들지 못하는 나…를 위해 이 편지를 써서 ‘나 한 사람을 위해 보냈구나’라는 것에 감격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빌레몬서’는 바울과 특별한(?) 관계가 있는 사람, 한 교회에 유력한 어떤 인물에게 보낸 편지가 아닙니다. 겉으로는 그렇게 보이지만, 그런 단순한 내용이 아닙니다.
“나의 심복인, ‘오네시모’를 용서해라. 그리고 다시 나에게 돌려보내라. 내가 그를 복음의 일꾼(동역자)로 쓰겠다. 너는 나에게 빚진 것, 무엇보다 ‘십자가 복음’에 빚진 것이 있으니까 내가 말하는 것은 거절하면 안 된다.”라는 식의 청탁 혹은 추천서 수준의 편지가 아닙니다.
“’빌레몬’이 못 알아들을까 봐… 그가 어떤 사랑과 어떤 은혜를 받은 사람인지 못 알아들을까 봐… 처음 복음을 접했을 때 그 마음을 잊어버리고, 오네시모 때문에 마음이 상해 있을까 봐… 그 상한 마음 때문에 예수님의 생명을 놓칠까 봐…”기록한 편지입니다.
6. 오늘도 어김없이 말씀 앞에서 어쩔 줄을 몰라 했습니다.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부끄러움에 한숨만 쉬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저처럼 ‘오네시모’를 보면서 갈등하고 아파하는 ‘빌레몬’의 마음을 만지시는 예수님을 ‘빌레몬서’ 안에서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또 용기를 냈습니다. 뻔뻔스럽지만, 함께 말씀을 나눌 용기를 냈습니다.
말씀을 앞에 두고, 다시 한번 깨닫습니다. “겉으로 드러난 사람의 반응으로 그를 판단하는 어리석음을 버려야 한다. 같은 마음으로, 그 사람의 마음으로, 예수님이 그를 바라보시는 마음을 달라고 가장 먼저 기도해야 한다.”라며 십자가 앞에 엎드립니다.
그렇게 인정할 수 밖에 없는 것이 또 하나 있습니다. ‘상대방을 향한 나의 판단과 결정이 나의 영적 상태이며, 수준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이런 저를 보면 부끄러움에 몸부림칩니다. 그러나 거기에서 머물지 않겠습니다. 이런 저를 긍휼히 여기시는 예수님… 이런 저의 마음을 보시며 위로하시고, 다시 십자가로 부르시는 예수님의 음성, 그 마음을 붙듭니다.
그래서 십자가만이 유일한 소망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십자가를 바라보며, 예수님의 성품에 한 걸음 더 다가가는 우리가 되길 축원합니다.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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