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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진Hyung Yun

12월 22일 2020년 화요일 묵상

최종 수정일: 2020년 12월 23일

본문: 베드로후서 1장 12~21절


1. 오늘 본문은 베드로가 편지를 기록한 또 다른 이유와 자신의 사도(使徒, apostle)됨에 대한 영적 권위를 서술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사도’를 종교성이 가득한 신성스런 직분(?)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종교적 특권을 가진 사람들이 아니라 ‘보냄을 받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사도’의 어원은 ‘파견하다’의 뜻을 가진 헬라어 동사 ‘apostello’에서 온 것입니다. 그러나, 또 이것을 너무 일반화하여 ‘신사도 운동’을 합리화하는 데 사용하는 것도 안 됩니다.

이런 것을 강조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도 모르게 ‘사도, 권위, 변론’ 등과 같은 단어가 주는 선입견으로 성경을 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가 읽는 이 본문은 베드로가 기록한(거창한 표현: 저술한) 책, 서적, 논문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편지를 읽고 있습니다. 가장 개인적이면서, 가장 마음을 표현한 글을 읽고 있습니다. (제발, 성경 기록자를 대할 때, ‘어떤 사도가 신약성경의 대부분을 기록했다. 어떤 성경의 인물이 성경을 얼마나 기록했다. 시편을 이렇게 많이 기록했다.’라는 식의 종교업적 순위를 매기려는 좋지 못한 습관을 버려야 합니다.)

12~15절이 그것을 증명합니다. 특히 13, 14절의 “이 장막에 있을 동안에…”, “나도 나의 장막을 벗어날 것이 임박한 줄을 앎이라”를 통해 ‘편지’ 정도가 아니라, ‘유언’에 가깝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장막을 벗는다’는 표현은 육체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베드로의 마음을 생각해보십시오. 초대교회 내적으로는 ‘거짓교사들’의 꾐, 유혹, 속임수의 공격을 받고 있었습니다. 외적으로는 ‘황제로 대표되는 로마제국의 권력과 이익 집단들’의 공격이 목을 조여오듯 다가오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자신의 사도됨의 권위, 자격 따위를 운운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진심 외에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진솔하게 기록하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이 편지를 읽고 받아들이고, 안 받아들이고는 상대방의 문제입니다.

종교성으로 가득하고, 높아진 우리의 시선을 낮추면 ‘성령의 감동’을 받은 성경 기록자들의 마음이 보입니다. 그 마음이 보이면 동시에 ‘성령의 마음’이 느껴집니다.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는 성령님’이 가리키는 바를 알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2장 5~16절)


2. 저는 16절의 “교묘히 만든 이야기를 따른 것이 아니요”라는 표현을 보면서 ‘베드로가 참 억울한 일을 많이 당했구나. 십자가의 진리만을 말하는 그를 많이 핍박했구나.’라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특히, 당시에 활동하던 영지주의(靈智主義) 이단(異端)들은 ‘영적인 것, 즉 보이지 않는 것’은 ‘좋은 것, 선(善)한 것’으로 보았습니다. ‘육적인 것, 보이는 것’은 모두 나쁜 것, 악(惡)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을 거절했습니다. 이것은 자연스럽게 십자가에서 완전한 대속의 제물 되심을 거부하게 됩니다. 눈에 보이는 부활체로 다시 살아나신 것은 더더욱 거부하게 됩니다.

그러니 베드로는 17~18절에 기록된 ‘변화산 사건(마태복음 17장) ’을 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하나님의 아들 되심과 십자가 고난 이후 부활체로 영광 중에 다시 살아나신 모습을 직접 보고 체험한 것을 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한가지 더 말합니다. 19절입니다. 이것은 ‘성령 강림 사건’을 말하는 것입니다. 영지주의자들은 성령께서 각 사람에게 임재한 것도 거부했습니다. ‘거룩한 영적 존재이신 성령께서 어떻게 더러운 인간의 육체에 오실 수 있느냐’라며 성도들을 미혹한 것입니다.


3. 어쩌면 이들이 이렇게 거부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 성령을 보내주신 진정한 이유를 몰랐기 때문입니다. 아니, 관심이 없었다고 말하는 것이 맞습니다.

인간이 예수님을 싫어하는 이유는 복잡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주인 되심을 거절한 인간, 그렇게 하나님을 떠나 범죄한 인간 죄성의 본질이 드러나는 것이 싫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인간이 자아실현에 취해 하나님을 떠날 수만 있다면 ‘이 땅의 모든 것’을 채워줄 수 있는 존재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자아실현의 도구’로 이용하도록 기독교라는 종교에 심취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십자가의 본질과 진리는 가려두고 십자가를 종교의 상징과 무속의 도구처럼 이해하도록 얼마든지 속일 수 있습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내 안에 임재하시는 이유는 나를 신비한 능력을 입은 신적 존재로 만드시려는 것이 아닙니다. ‘내 속에 어두운 데를 비추시기 위함’입니다. 여전히 어둡고 악한 인간의 내면 구석구석을 비추시기 위해서 함께 하십니다. 내가 걸어야 할 성화(聖化, Sanctification)의 길을 함께 걸어가시기 위해 임재하여 계십니다.

성령의 감동은 사람의 뜻(의지, 바람, 원함)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의 예언은 범죄한 인간의 생각으로 도무지 말할 수도 없고, 깨달을 수도 없는 것입니다. 네, 십자가입니다.

20절의 ‘성경의 예언을 사사로이 푼다’는 것은 성경을 빌미로, 예언을 빌미로 사람의 욕망에 맞는 말을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의 이익을 위해 점괘를 말하듯 행하는 모든 종교 행위입니다. 거기에 종교화, 무속화 된 의미로 ‘성경, 기도, 사명, 은혜, 축복, 예수, 십자가, 부르심’ 등의 단어를 섞어도 소용없습니다.

예수님의 영이신 성령님께서 성경 말씀을 깨닫게 해주셨다면, 우리는 그 말씀 속에서 오직 예수님, 그 분의 십자가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성령님은 우리를 다시 오실 예수님에게 반드시 인도하십니다. 두려움이 아니라, 사랑과 은혜로 인도해 주십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성경 속에서 날 위해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신 처음 오신 예수님을 발견하십시오. 다시 오실 예수님께 인도하심을 확인하십시오. 이것 만이 진정한 내 삶의 능력이 되는 줄 믿습니다.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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