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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진Hyung Yun

12월 21일 2020년 월요일 묵상

본문: 베드로후서 1장 1~11절


1. 베드로의 두번째 편지입니다. 거짓교사들에 영향을 받고 있는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바른 복음과 신앙의 자세를 알려주기 위해 기록한 것입니다.

‘베드로전후서’를 보면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무식한, 과격한, 배우지 못한, 어부 출신’이라는 생각이 어리석은 선입견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자신도 모르게 직업의 귀천 혹은 과거 이력에 사로잡혀 사람을 쉽게 판단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물론, 베드로를 대단한 인물로 추켜세우려는 것은 아닙니다. 그저 이 편지를 통해 예수님을 향한 베드로의 진솔한 마음, 죄인인 자신이 감히 예수님의 제자로 예수님 가장 가까이에서 그 분을 인격적으로 만날 수 있었음에 감격하고 감사하는 마음을 발견할 수 있기를 바랄 뿐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베드로 사도’가 기독교인의 도덕, 윤리 덕목을 나열한 것처럼 보입니다. 특히 5~7절이 당연히 그렇게 보입니다. 여기에 나열된 것들이 4절의 “신성한 성품”이라고 여깁니다. 다 맞습니다. 그런 예수님의 성품, 하나님이 사람과 함께 공유하시는 좋은 성품을 닮아야 합니다. 신학적 용어로 ‘공유적 속성(公有的 屬性)’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게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좋은 성품을 닮고 싶지 않은 기독교인은 없을 것입니다. 5~7절이 우리 삶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거절하거나, 부정하고 싶은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정말 주목해야 할 것이 무엇일까요? 어쩌면, 여기에 나열된 ‘믿음, 덕, 지식, 절제, 인내, 경건, 형제 우애, 사랑’을 내가 내 힘으로 행하려는 것 자체가 불가능입니다. 만약, 내가 그것을 행했다고 착각한다면 ‘자기 의로움과 행위구원’의 굴레에 다시 빠져드는 것입니다.

2. 이런 귀한 덕목들이 행해지는 원동력, 근원적인 힘(?)이 무엇인지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3절의 “그의 신기한 능력”입니다. ‘예수님의 신기한 능력’으로 말미암은 ‘생명’과 ‘경건’입니다.

오히려, 점점 더 미궁(?)으로 빠지십니까? “‘신기한 능력’이 더 신기하다. 헷갈리는 것 아니냐, 불명확한 것 아니냐?!”라는 마음이 드십니까?

아닙니다.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우리는 ‘신기한’이라는 단어, 그 단어가 주는 사람 생각에 갇혀서 가장 ‘신기한 것’을 놓치고 있습니다.

인간의 이성과 인류의 역사 속에서 가장 신기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심, 그 분이 나의 죄를 위한 대속의 제물 되심, 영원한 생명 주심을 확증하기 위한 부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의 사건’보다 더 신기한 것은 없습니다!

3절의 ‘경건, 덕’을 제대로 해석해야 합니다. 종교 도덕의 덕목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윤리적 탁월함을 추구함으로 얻는 어떤 이익 따위가 ‘영광’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떠나 죽은 죄인’이 ‘성령의 부르심, 비추심, 깨닫게 하심’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자’로 영접하는 것이 진정한 하나님의 영광이며, 덕이며, 경건이며, 생명이며, 신기한 능력입니다!


3. 베드로는 가장 잘 알고 있었습니다. 자신이 도무지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종교지도자, 선생 정도로 생각하며 따라다녔던 자신이, 십자가 사건과 성령의 임재를 체험한 뒤 달라진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이런 것들을 사람 말로 어떻게 설명이 가능하겠습니까? ‘신기한 능력’이라고 밖에는 뭐라 표현하겠습니까?

오늘 읽으신 본문은 1~2절의 인사를 제외하고는 ‘구원에 대한 신비’와 구원받은 사람을 이끄시는 성령의 신비한 능력에 대한 감탄과 감격으로 써내려 간 것입니다. 2~11절은 망설임 없는 은혜의 감격으로 써내려 간 것입니다.

특히, 9절을 보십시오. 십자가의 은혜로 죄에서 깨끗하게 된 것을 붙들지 않고 ‘예수님’을 전하는 사람(거짓교사들)들을 ‘맹인’이라고 말합니다.

저와 여러분이 누구를 가르치지 않아도 우리가 살아가면서 ‘십자가에 못박힌 삶, 그 십자가의 은혜로 다시 회복된 생명’을 놓친 삶을 산다면 ‘맹인’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안다는 것! 그것은 성경 지식을 아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십자가의 깊이를 아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나 대신 제물이 되신 예수님을 아는 것입니다. 나는 십자가에서 사라지고, 예수님만 드러나는 것이 진정한 감사, 축복, 기쁨이라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11절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는 단순히 죽어서 가는 곳이 아니라, 내 안에 십자가를 통한 예수님의 통치가 회복되는 것임을 믿습니다. 주님의 나라가 우리 안에, 우리 삶의 현장에 임하길 축원합니다.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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