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역대하 35장 1~19절
1. 오늘 본문은 ‘요시야 왕’이 유월절을 지킨 기록입니다. 할아버지 므낫세 왕 이후 중단된 유월절을 다시 회복시킨 것입니다.
34장에서 시작된 요시야의 개혁은 우상 척결, 성전 수리, 율법책 발견을 지나 유월절을 지킨 것으로 마무리됩니다.
특히 그가 왕위에 오른 지 열 여덟 번째(18년) 되는 해는 신앙의 회복과 개혁이 정점이었습니다. 성전 수리와 동시에 발견된 율법책의 내용을 바탕으로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와 종교에 있어 가장 중요한 ‘유월절’을 지켰기 때문입니다.
늘 말씀드리지만, 유월절의 규모 혹은 제물로 드린 짐승의 숫자에 마음이 빼앗기면 안 됩니다. 18절의 기록을 보면서 ‘역사상 가장 성대한 유월절’이라는 식의 생각은 일차원적이고, 유치한 발상입니다. “사무엘 이후로(열왕기하23:22에는 ‘사사 시대’를 언급)…”라는 말은 역사상 가장 간절한 마음, 감격적인 마음, 낮은 마음, 하나님 앞에 송구(?)한 마음으로 ‘유월절’을 지켰다는 뜻입니다.
2. 인간의 간사한 마음은 자꾸만 7~9절에 기록된 엄청난 짐승의 숫자에 시선을 고정시키려 합니다. 왕과 지도자들이 백성들을 위해 ‘제물’을 많이 드렸다고 말합니다. 그러니 이런저런 축복을 많이 받은 사람, 지도자라고 생각되는 사람들이 많이 내놓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맞습니다. 그렇게 해야 합니다.
하지만, 요시야, 대제사장, 레위인의 우두머리들이 내놓은 것은 유월절을 지키기 위한 ‘속죄의 제물’입니다. 너무 오랫동안 유월절을 비롯한 여호와 하나님의 절기와 대속의 은혜를 위한 속죄의 제물을 드린 적이 없는 보통의 사람들을 위해 내놓은 것입니다.
무엇보다 이것은 절대 ‘종교적 기부’가 아닙니다. 자기 반성입니다. 지도자로서 백성들을 바른 신앙과 믿음으로 이끌지 못한 것에 대한 책임을 져야 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을 버리고, 우상을 섬긴 자신들의 책임을 인정한 것입니다.
고대 이스라엘을 비롯한 고대 사회에서 일반 백성들은 거의 문맹입니다. 율법책이 있어도 읽지 못합니다. 읽을 줄 안다고 해도 책 자체는 고가의 희귀재(稀貴財)라 구할 수 없습니다. 구해서 읽는다고 해도 여호와 하나님께서 베푸신 대속의 은혜와 언약이 무엇인지 바로 깨달을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따라서 왕을 비롯한 제사장, 레위인(서기관) 등이 보여주는 신앙의 자세와 중심을 따라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이 보여주는 종교적 방식과 이해를 모방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십자가 복음에 대한 우리의 마음 자세, 태도, 고백, 삶의 열매는 숨길 수 없습니다. 우리 주변의 사람들은 우리가 행한대로, 우리가 말한 대로, 우리가 걸어간 길 그대로 따라옵니다.
이걸 잊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안타까워하는 그 사람도, 심지어 비방하는 그 사람도 결국 우리가 따라간 십자가의 가치를 보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나는 어떤 십자가의 가치와 진리를 따라가고 있는가?”라는 스스로에게 질문 앞에 서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으며 추구한 진짜 가치와 그 가치를 따라간 나의 본심이 무엇인지 매일 점검해야 합니다.
3. 오늘 말씀, 특히 엄청난 ‘제물’을 내놓은 왕과 지도자들을 보며 이런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왕과 제사장, 레위인들이 어떻게 저렇게 많은 ‘짐승’을 가지고 있을 수 있었을까?”라고 말입니다. 단순히 왕이니까, 지도자들이니까 부유했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머물지 마시고 조금만 더 생각해봅시다.
여러분의 의견은 어떠십니까? 어떻게 저렇게 많은 ‘양, 염소, 수소’를 가지고 있었을까요? 네, 이유는 한가지입니다. 아무도 대속의 제사를 드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너무 오랫동안 율법책에 기록된 ‘속죄제, 속건제, 화목제 등등’ 하나님께서 죄인을 용서하시고, 새 생명 주시기 위한 은혜의 제사를 드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율법책을 통해 다시 ‘대속의 은혜’를 붙든 요시아, 제사장, 레위인 소위 축복받았다는 지도자들이 이런 충격을 받지 않았을까라고 생각해봅니다. “이게 다 뭐지? 내가 뭘 한 거지? 늘어나는 짐승의 숫자를 보며, 늘어나는 재산을 보며 축복이라고 좋아했는데… 우리가 진정한 속죄의 제사를 드리지 않아서 늘어난 것이었네!”라는 탄식이 있었을 것입니다.
암울했던 두 세대가 지난 뒤에 지킨 유월절은 ‘속죄의 눈물’과 ‘감격의 눈물’이 뒤섞였을 것입니다. 사실은 유월절을 지킬 때마다 죄에 대한 탄식과 구원에 대한 감격을 잊어서는 안 되었습니다.
성탄절이 다가옵니다.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는 들뜬 분위기, 선물과 인사, 만남 등도 좋습니다. 그러나, 우리 마음 깊은 곳에 예수님께서 저와 여러분, 온 세상의 구원을 위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이유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요시야 왕을 통해 유월절이 회복되었듯 이 땅의 모든 성도와 교회를 통해 다시 온 세상에 ‘성탄절’의 참 의미가 회복되길 축원합니다.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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