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역대하 34장 14~33절
1. 오늘 말씀은 요시야 왕이 성전을 수리하면서 ‘율법책’을 발견하게 된 사건의 기록입니다. 율법책을 발견했다는 것은 ‘모세 5경(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을 발견한 것으로 보시면 됩니다. ‘모세 5경’은 모세가 기록한 한권의 책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구속의 역사와 대속의 은혜’를 가장 처음 사람의 언어로 기록하여 주신 것입니다.
발견된 율법책을 제사장 ‘힐기야’가 서기관 ‘사반’에게 주었고, ‘사반’이 ‘요시야’ 왕에게 가져가 읽습니다.
이 말씀을 들은 요시야는 회개합니다. 19절에 ‘옷을 찢었다’는 표현은 철저한 회개를 의미합니다. 옷을 찢은 것은 마음을 찢은 것에 대한 표현입니다.
요시야는 비로소 정확히 알았습니다. 어렴풋이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래서 그랬던 것이 아닐가?’라는 추측이 ‘기록된 율법책’을 통해 명확한 사실로 바뀝니다. 이미 앗수르에 멸망한 북이스라엘과 이민족의 위협에 노출되어 언제 전쟁과 멸망을 겪을지 모르는 남유다가 왜 이렇게 되었는지를 깨닫습니다. (21절)
항상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없었던 ‘하나님의 진노’가 쏟아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불순종하여 떠난 인간의 운명은 영원한 멸망과 죽음, 진노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대속의 은혜’를 베풀어서 돌이켜 세우신 것입니다. 그 은혜를 버린 것은 인간입니다. 그 은혜를 떠나 다시 멸망의 길로 걸어간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었습니다. 이것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하나님을 원망하게 됩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믿음 좋은 듯한 ‘운명론’에 빠집니다.
2. 이제 요시야 왕은 ‘훌다’라는 여자 선지자에게 사람을 보냅니다. 제사장 혹은 왕실의 예복을 관리하는 ‘살룸’이라는 사람의 아내입니다. 신분과 거주지를 정확히 밝힌 것은 공인이 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22절)
여기서 중요한 것은 ‘여성’이라는 성별이 아닙니다. ‘교차 검증’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요시야 왕이 있을 때 ‘예레미야 선지자(렘1:2)’, ‘스가랴 선지자(습1:1)’가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분명, 이 두 선지자에게도 ‘율법책’의 진위와 자신이 받은 감동과 그에 따른 회개에 대해 물었을 것입니다. 자신이 지금까지 해온 이런 저런 개혁이 ‘율법책’에 합당한 것인지 함께 검증하고, 나누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또 훌다라는 여자 선지자에게 이 모든 것을 다시 확인한 것으로 보시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훌다를 통해 요시야가 진정으로 회개한 것을 보셨다고 말씀하십니다. 그의 통곡과 기도를 들었다고 말씀하십니다. (27절)
3. 여기서 조금 유심히 살펴볼 구절이 있습니다. 27~28절입니다. 특히 28절의 “내가 이 곳과 그 주민에게 내리는 모든 재앙을 네가 눈으로 보지 못하리라”라는 것이 요시야가 바랬던 응답(?)이었을까요? 왕이 회개하면 ‘남유다’전체의 구원 혹은 축복으로 이어져야 하는 것 아닌가요?
만약, 저와 여러분이 요시야 왕이라면, 이런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면 어떤 마음이 들겠습니까? “적어도 남유다가 망하는 꼴을 내가 직접 보지 않으니 다행이다.”라며 안도할 수 있을까요?
좀 이기적(?)인 말이지만, 이 말을 들은 것만해도 감사한 것이 맞습니다. 공동체의 구원보다 중요한 것은 개인의 구원입니다. 아니, ‘개인 구원’ 없이 ‘공동체 구원’은 없습니다.
신앙 생활은 개인적인 것입니다. 우리가 너무 잘 알 듯이 ‘배우자, 자녀, 가족 등’이 어떤 신앙 좋은 대표자에 의해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 아닙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니다. 그 분과의 인격적인 관계 회복을 위해 십자가에 붙들려야 합니다.
이런 표현이 적절할지 모르겠습니다만… 십자가를 종교 상징화하여 바라보고, 연구하고, 추종하는 것은 다수의 사람이 동시에 가능합니다. 그러나,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은 한 사람만이 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는 1인용입니다. 한 영혼을 위한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주변의 사람들을 위해,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가까운 그들을 위해 전도해야 합니다. 십자가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신앙의 권면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내가 예수님과 함께 못 박혀 죽지 않은 십자가, 그 분과 함께 다시 살아난 생명으로 살아가는 삶이 없이는 아무 소용없습니다.
결국 ‘개인의 구원’이 하나하나 모여 ‘공동체의 구원’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28절은 왕이었던 요시야에겐 절망적인 응답이었을 것입니다. 나라를 바로 세우려는 지금까지의 노력이 허망하게 느껴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습니다. 장로들과 백성들에게 언약책의 말씀을 들려줍니다. (30절) 무엇보다 중요한 자기 자신이 가장 먼저 여호와 앞에서 언약을 세웁니다. ‘자기 처소’에서 세웁니다. (31절) 네, ‘개인 구원’을 가장 먼저 붙들었습니다.
요시야는 28절의 말을 듣고 ‘하나님의 뜻은 어차피 멸망인데…’라며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운명론에 빠지지 않았습니다. 오늘 내 앞에 있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 언약’을 붙잡았습니다.
오늘 내게 허락된 ‘십자가 언약’을 내가 매일 붙드는 삶이 우리를 진정한 승리, 은혜, 축복의 삶으로 인도할 줄 믿습니다.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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