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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진Hyung Yun

12월 16일 2021년 목요일 묵상

본문: 요엘 1장 13~20절


1. 오늘 본문은 남유다의 제사장들을 향한 하나님의 심정이 담겨 있습니다. 13절의 시작, “제사장들아”는 탄식입니다. 이스라엘의 최고위층(?), 일명 영적 지도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아픈 마음이 드러납니다.

그들에게 ‘금식’을 선포하십니다. ‘성회’라는 것은 단순한 종교적 모임이 아닙니다. 원문을 살펴보면, ‘금식을 위한 모임’을 가지라는 뜻입니다. 지금까지 먹고, 마시고, 즐기던 것들을 멈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함께 모이라는 말입니다. 모여서 여호와께 부르짖으라는 말입니다. 회개하라는 말입니다. 돌이키라는 말입니다(14절).

2. 그런데, 다시 생각해볼 것이 있습니다. 그들이 ‘금식’하는 것은 자신들의 의지(?)가 아닙니다. 인간의 종교심이 발동하여 이루어진 어떤 행위가 아닙니다.

금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우스갯소리로 말하는 ‘금식(禁食)’이 아니라, ‘굶식’입니다. 네, 이미 모든 농작물은 메뚜기 떼로 인하여 남은 것이 없습니다(4절). 흥청망청 마시던 포도주, 그 풍성하던 기름은 떨어졌습니다(5, 11절). 과일도 사라졌습니다. 모든 사람의 즐거움이 말랐습니다(12절).

저는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라도 모일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 주시는 은혜’ 말입니다!

그대로 놔두면 어디까지 갈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대로 내버려두면 진짜 망하는 길로 가기 때문입니다. 도무지 돌이키지 않기 때문입니다.


3. 그렇게, 굶을 수밖에 없어 행하는 ‘금식’마저도 인정해주시는 하나님! 내가 기도하며 흘리는 눈물이 지금 상황 때문에 억울하고(?), 답답하고(?), 속상해서(?) 흘리는 것일지라도 ‘나에게 부르짖는 것’이라며 들으시는 하나님!

이런 하나님의 마음, 이런 하나님의 긍휼하심, 이런 하나님의 선하심, 이런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이 없었다면 우리는 없습니다.

“들을지어다! 귀를 기울일지어다!(2절)”라고 아무리 외쳐도 듣지 않는 범죄한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 결국은 스스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하나님! 종교행위로 전락한 제사를 진정한 제사,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로 완성하신 하나님(예수 그리스도)! 내 안에 성령으로 오셔서 나를 다스리시는 하나님!

다시, 그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깊이 묵상합시다. 모든 것을 멈추고 잠시라도 이런 나에게 베풀어 주신 당연하지 않은, 당연할 수 없는 은혜를 묵상합시다.


4. 저와 여러분에게는 경험이 있습니다. 예배에 목말랐던 영적 갈증이 있었습니다. ‘출석할 교회, 다니는 교회’가 아니라, ‘예배 드릴 교회, 내 심령을 십자가 앞에 쏟아 놓을 교회’에 대한 갈망이 있었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저에게 필요한 교회는 사역할 교회, 담임할 교회가 아닙니다. 함께 예배 드릴 교회입니다. 말씀으로 제 심령을 수술하며 함께 여호와께 부르짖을 교회, 멈춰진 예배가 회복되는 생명의 공동체가 필요합니다!

이런 마음으로 교회를 바라본다면 나머지는 해결됩니다. 사람이 세운 계획, 하나님의 이름으로 포장되었으나 결국 사람이 가고자 하는 방향, 비전(vision)이라는 세련된 이름으로 포장된 곳으로 흘러가지 않습니다.

좀 더디 가는 것 같아도, 화려해 보이지 않아도 바른 방향으로 가게 됩니다. 십자가가 가리키는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옳은 길로 나아가게 됩니다.

5. 요엘서의 핵심은 2장 12~14절에 있습니다. (이것은 요엘서만의 핵심이 아닙니다. 모든 선지서, 모든 성경의 핵심입니다.) “이제라도 돌아오라!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어라! ‘소제’와 ‘전제’를 드리게 하지 아니하실는지 누가 알겠느냐?”

특히, 14절을 주목해보십시오. 이것은 결과를 예측한 것이 아닙니다. 회개하며 축복을 주신다는 결과가 목적이 된 마음의 태도가 아닙니다.

“하나님, 돌이키겠습니다. ‘소제’와 ‘전제’가 회복되지 않아도 됩니다. 사람들이 말하는 복을 주시지 않아도 상관없습니다. 나의 죄악을 쏟아내는 피의 제사만 있으면 됩니다.”라는 의미입니다.

(길게 설명드릴 수 없지만, 곡식을 빻아 드리는 ‘소제’와 포도주를 제물에 부어 드리는 ‘전제’는 ‘번제, 속죄제, 속건제’처럼 죄를 용서받기 위해 짐승을 대신 죽여 드리는 필수 제사가 아닙니다. 풍요를 바탕으로 한 헌신과 봉사 등을 의미하는 제사의 종류입니다.)

신약적 의미로 한다면, “범죄한 내가 예수님과 함께 못박히고, 그 분이 나 대신 사시는 십자가의 은혜만 있어도 됩니다.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관심이 있습니다.”라는 영혼의 고백이 14절입니다.

예상하고, 기대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영혼의 태도로 살아가는 사람을 절대 내버려두지 않으십니다. ‘소제’와 ‘전제’를 드릴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니다.

육신의 삶 가운데, ‘땅의 열매가 나를 삼켜버리지 않을 정도의 축복’과 ‘땅의 열매에 삼킨 바 되지 않을 전인격의 태도와 삶의 자세’를 허락해 주십니다.

저와 여러분에게 ‘당연한 은혜’는 없습니다. 그래서 또 다시 십자가의 은혜를 붙드는 진정한 축복이 넘치길 축원합니다.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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