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역대하 34장 1~13절
1. 역대하 34~25장은 ‘요시야 왕’에 대한 기록입니다. 므낫세의 손자, 아몬의 아들이었던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걸었던 길에서 돌이키려 노력했던 왕이었습니다. 아쉬운 점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요시야는 하나님에게서 점점 더 멀어지는 남유다, 돌아오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스스로 멸망길을 가는 남유다를 멈춰 세우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요시야 왕은 8세에 왕위에 오릅니다. 그렇게 어린 나이에 왕이 된 이유는 ‘역대하 33장 24~25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버지 아몬이 반역에 의해 죽임을 당했기 때문입니다. 그 반역의 세력은 다시 백성들에게 처형을 당했습니다. 백성들에게 반역자들이 죽임을 당한 것을 보면 반역을 꾀한 이유가 정당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남유다 백성들은 므낫세와 아몬으로 이어지는 왕들의 악행에 유다 백성들도 더 이상 참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다시 ‘다윗, 히스기야’같은 왕이 나타나길 기대하는 마음으로 ‘요시야’를 왕으로 세웠을 것입니다.
정말 다행스럽게도 그의 첫 시작은 순조로웠습니다. 2절의 기록이 읽는 이들에게 안도감을 줍니다. 그렇게 3~7절은 예루살렘뿐만 아니라, 남유다 전 지역을 돌며 우상을 척결하는 내용입니다. 8~13절은 방치되고 훼손된 여호와 하나님의 성전을 수리하는 내용입니다.
2. 요시야 왕의 개혁은 하루 아침에 시작된 것이 아닙니다. 3절의 기록을 보면 16세의 어린 나이에 하나님을 찾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왕위에 오른 지 12년, 그의 나의 20세에 대대적인 개혁을 시작합니다.
요시야의 개혁은 참 오랜 시간을 기다린 뒤 시작됩니다. 요시야가 왕이 된 시점으로부터 본다면 약 12년, 그가 ‘비로소 하나님을 찾은 16세’를 기점으로 본다면, 약 4년의 시간이 걸렸습니다.
물론, 8세라는 어린 나이에 ‘종교개혁’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더군다나 종교와 정치가 하나로 일치된 국가에서는 더더욱 불가능합니다. ‘종교개혁=정치개혁’이기 때문입니다.
16세에 개혁을 주도한다는 것 역시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분명 그에게는 더 장성할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이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이 기다림의 시간 가운데 무슨 일이 있었느냐?’입니다. 성경에 기록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짐작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어린 나이이지만, 스스로 하나님을 찾았다는 사실입니다.
혹시, 기억이 나십니까? 남유다 역사에서 ‘반정(反正, restoration)’ 에 의해 어린 나이에 왕이 된 사람이 있습니다. ‘요아스’입니다. (역대하 24장)
‘요아스’와 ‘요시야’는 이름도 왕이 된 배경도 비슷합니다. 그런데 큰 차이가 있다면, ‘요아스’는 ‘여호야다 대제사장’이라는 ‘사람 스승’이 있었으나, ‘요시야’는 없었다는 점입니다.
저는 ‘신앙의 스승, 멘토, 지도자’가 필요 없다는 것을 말하려는 게 아닙니다. 있어도 됩니다. 있는 것이 큰 도움이 됩니다. 필요 합니다.
그러나, 결국은 자기 자신이 스스로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남이 못 박힌 십자가가 아니라, 내가 나의 주인이신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합니다. 이렇게 십자가에 붙들린 삶을 말 죽을 지 언정 놓쳐서는 안 됩니다.
3. 저는 오늘 말씀을 보면서 이 고백까지 오는 데 참 힘들고, 망설여졌습니다. 기록으로 남아서 더더욱 그랬습니다.
제가 걸어온 신앙생활의 길을 돌아보았습니다. ‘유소년기’에는 기독교 가정이라 그냥 당연히 교회를 다녔습니다. 재미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청소년기’에는 자아가 생기면서 방황이라는 핑계로 교회를 떠났습니다. ‘청년기’에는 다시 교회로 돌아왔습니다. ‘신앙 좋다. 교회 생활 열심히 한다.’라는 말이 듣기 좋았습니다. 친구도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가정에서 인정받았습니다. 교회를 열심히 다님으로 오는 칭찬, 주목, 기대, 인정 등이 참 좋았습니다. 특히, 가족의 최고 어른이시며, 실권자(?)이신 할아버지의 인정이 너무 좋았습니다.
하지만, 결국 깨달은 것은 ‘제 자신이 단독자로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서지 않았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겉으로 보기엔 교회생활 누구보다 열심히 하는 청년이었지만, 실상은 사람의 눈에 들고 싶은 마음, 그런 껍데기가 저를 둘러 싸고 있었음을 알았습니다.
지금 더 자세히 말씀드리기엔 한계가 있지만, 결국 저는 바닥에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저를 감싸고 있던 모든 껍데기가 벗겨져 나가니 제 실상, 실존, 실체가 보였습니다. 그걸 보고 나니 ‘십자가는 제 인생의 악세서리’가 아니었습니다. ‘저기에 못 박히지 않으면 죽는다’는 생명의 본능이 솟아올랐습니다. 그렇게 악세서리로 걸쳤던 십자가는 제가 죽고, 그분 안에 사는 생명이 되었습니다.
제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있습니다. 저희 아이들이 ‘십자가의 주님을 만나는 것에 사람인 제가 걸림돌’이 될까 두렵습니다. 저희 아이들이 제가 목회자이기에, 기독교 가정이라 ‘예수님’이 너무 당연하게 다가올까 두렵습니다. 교회를 열심히 가고, 교회 생활을 열심히 하면 ‘아버지인 제가, 어머니인 제가 좋아하니까’ 자기도 모르게 사람에게 잘 보이려고 종교생활 할까 봐 가장 두렵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붙들게 됩니다. 기도하게 됩니다. 묵상하게 됩니다. 목사로서 십자가를 붙잡는 것이 아니라, 설교 준비하려고 성경 읽는 것이 아니라, 기도의 의무(?)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생명의 십자가에 못 박힘으로 다시 살기 위해 다시 십자가로 향합니다.
“It’s all about crucifying myself on the cross with my Lord Jesus!”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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