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역대하 33장 1~25절
1. ‘역대하 33장’은 ‘므낫세 왕’에 대한 기록입니다. “므낫세 아, 므낫세!”라는 마음의 소리가 울립니다. 두가지 이유 때문일 것입니다. 첫째는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를 거절하고, 무시하는 그의 모습 때문입니다. 두번째는 결국 그를 돌아오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므낫세’ 저기 멀리 나와 상관없는 그 누군가가 아닙니다. ‘십자가 대속의 은혜’를 놓치는 순간 누구나 ‘므낫세’가 될 수 있습니다. ‘므낫세’는 왕이었습니다. 율법을 모를 리 없습니다. 어릴 적부터 유대교 전통에 충실한 최고의 교육을 받으며 자랐을 것입니다. 오늘날 그 어떤 목회자, 신학자, 기독교인들보다 성경을 비롯한 이스라엘의 역사를 잘 알았을 것입니다.
그런 그의 보여준 삶, 걸어간 인생의 길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당혹스럽기까지 합니다. ‘저 악한 므낫세의 모습은 나와 상관없다.’라는 생각을 버리고 가만히 읽어보십시오.
그러면 결국… 10~13절을 붙잡게 됩니다. 범죄한 므낫세를 비방, 비난, 손가락질하기 보다 ‘돌이킨 므낫세’, 그리고 그에게 ‘다시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을 붙들게 됩니다.
2. 므낫세를 비롯한 이스라엘의 우상숭배의 특징?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전’ 즉 성전을 치워버린 적이 없습니다. 방치를 할 지 언정 완전히 파괴하거나, 없애 버리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할까요? 겸하여 섬긴 것입니다. 우상과 여호와 하나님을 같이 섬겼습니다. 하나님만을 섬기는 성전에 갖가지 우상을 갖다 놓고 같이 섬겼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입니다. ‘므낫세’를 비롯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여호와 하나님이냐, 우상이냐?’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중요했던 것은 “어떤 신적 존재가 나에게 ‘내가 원하는 만큼, 내가 원하는 것을, 내가 원하는 때에’ 퍼부어 주느냐, 아니냐?”가 중요했습니다.
네, 자기 만족과 자기 충족, 자기 실현을 위한 것들을 주는 신이라면 물불(여호와, 우상)을 가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7절의 표현 “자기가 만든 아로새긴…”이라는 말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자기를 위해, 자기가 만든, 자기 신적 존재’를 ‘여호와 하나님의 성전’에 갖다 놓고 섬긴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속사람, 우리 죄악된 본성의 깊이를 여기까지 끌고 가지 못하면 ‘십자가에 대한 우상숭배’를 그칠 수 없습니다.
‘십자가의 진리 됨, 말씀의 거울 됨, 성령의 빛 됨’의 핵심은 거짓된 내 본성, 어두운 내 심령, 교묘한 내 본성이 낱낱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결코 부끄러움이나 수치심, 정죄감을 주시기 위함이 아닙니다. 십자가의 보혈로 ‘덮어 주시기 위함’입니다. ‘싸매 주시기 위함’입니다. 위로부터 임하는 회복, 근본적인 회복, 영원한 회복을 위해 ‘가려서 치유해주시기 위함’입니다.
3. 덮으시고, 싸매시고, 살리시려는 하나님의 열정과 사랑은 10~13절에 그대로 드러납니다. 하나님께서는 ‘므낫세’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므낫세’에게도 기회를 주셨습니다. 항상 주셨습니다. 계속 주셨습니다. 끝까지 주십니다.
11절의 “앗수르 왕”은 ‘에살핫돈’입니다. 그는 ‘산헤립’의 아들입니다. (산헤립: 히스기야 왕 때, 예루살렘 공격했다가 실패한 왕. ‘역대하 32장 20~21절’)
에살핫돈은 자신의 아버지가 정복에 실패한 남유다를 다시 침공했습니다. 그리고 므낫세를 포로로 끌고 갑니다.
이 과정 속에서 ‘므낫세’는 깨닫습니다. ‘하나님의 임재와 동행’이 사라진 자신의 운명이 어떠한 지를 깨닫습니다. 이방신들이 주는 땅의 축복, 심지어 하나님도 이방신들처럼 섬겨서 얻어내고, 유지하려 했던 모든 것들의 허망함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렇게 다시 ‘여호와 하나님’을 찾습니다. 자신을 살리시기 위해 ‘대속의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었습니다.
죄악을 씻어내지 않고, 대속의 은혜에 붙들리지 않을 때 ‘여호와 하나님의 임재와 동행’이 거둬진다는 것을, 거둬 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처절할 만큼 철저히 체험합니다. 돌이켜 엎드린 므낫세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은 그를 회복시키셨습니다. 그 옛날 ‘아도니베섹’처럼 ‘예루살렘’에 품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언약 안에 품어 주셨습니다. (설마, 다시 ‘왕위’에 앉은 것에 눈이 가시는 것은 아니시겠지요.)
10~19절은 ‘역대기’에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남유다 백성들이 왜 이것을 기록했겠습니까? 남유다 백성들은 분명 ‘므낫세’를 손가락질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망한 것은 므낫세 때문이다. 그가 제일 나쁘다. 그가 여호와를 격노케 했기 때문이다.(왕하23:26)”이렇게 비방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결국 깨달았습니다. “므낫세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우리였습니다. 그렇게 비난하던 ‘므낫세의 길을’ 우리가 다시 걸었습니다. 우리는 더 나쁩니다. 므낫세를 비방하면서 똑같이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므낫세에게 베푸신 그 은혜와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셨습니다.”라는 절절한 고백을 기록으로 남긴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난 뒤, 십자가의 진리가 무엇인 깨달은 뒤,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은 뒤 가장 귀한 축복 중 하나는 ‘내가 어떤 존재’인지를 철저히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면, 그래야 십자가를 내 생명보다 귀하게 붙들게 되기 때문입니다. 나에 대한 절망이 예수님에 대한 소망에 기댈 때 진정한 회복과 구원, 축복의 역사가 일어날 줄 믿습니다.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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