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역대하 30장 1~12절
1. 오늘 본문을 한참을 보고 또 봤습니다. 남북이스라엘로 갈라진 이후 대립하고, 갈등했습니다. 종교적 민족적 주도권 다툼은 끊이지 않았습니다. 이런 저런 이유로 전쟁도 수차례 치렀습니다. 남유다의 여호사밧 왕과 북이스라엘의 아합 왕이 결혼동맹으로 잠깐의 평화가 온 것처럼 보였지만, 이 일은 더 큰 고통, 타락, 몰락 등으로 이어졌습니다.
사실상 오늘 기록이 단일왕국 이후 남북이스라엘이 공식적으로 함께 ‘유월절’을 지킨 유일한 기록입니다. 더 안타까운 것은 ‘히스기야 왕’ 이후 왕이 된 ‘므낫세’의 통치 시대는 북이스라엘 ‘아합’보다 더 암울했습니다. ‘이럴 수가…’라는 통탄이 저절로 나옵니다.
늘 강조 드리듯이 ‘유월절’이라는 유대인의 절기 혹은 종교행사에 초점을 두면 안 됩니다. 심지어 ‘명절’이라는 단어를 사용함으로 사람들이 지키는 세속의 명절 분위기(?)와 혼동해서도 안 됩니다.
‘절(節Day)를 빼고, ‘유월(Passover, 逾越)’의 의미를 기억하고,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유월의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의 사랑과 ‘유월의 은혜’를 위해 대속의 제물이 되신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를 붙들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유월의 은혜’ 외에는 구원받을 수 없고, 소망이 없는 범죄한 나 자신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2. ‘유월절’에 대한 히스기야 왕의 마음이 느껴지는 것은 2~3절에 숨겨져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첫 달, 즉 1월은 ‘유월절’이 있는 달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둘째 달(2월)에 지킵니다.
이유는 성결하게 한 제사장들이 부족해서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결하게 한 제사장들’이라는 말 속에는 ‘정결 의식’ 뿐만 아니라, 제사장들의 자격과 훈련 등 모든 것이 포함됩니다. 이전 시대에 너무 오랜 동안 ‘여호와 하나님의 율례와 제사’가 무너졌기에 제대로 제사와 예배를 집례, 인도할 수 있는 제사장들의 수가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그럼, 왜 2~3절을 통해 히스기야 왕의 마음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두가지 속에 그의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첫째는 ‘날짜’에 집착하여 ‘유월절’을 다음 해로 넘기지 않았습니다. 두번째는 ‘날짜’를 맞추기 위해 날림으로 유월절을 지키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 어렵다는 ‘신중함과 신속함’이 2~3절에 녹아 있습니다. ‘신중함과 신속함’이 가능했던 이유는 가장 먼저는 ‘하나님의 예비하심과 인도하심’입니다. 어제 읽으셨던 ‘역대하29장 36절’에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리고, 이 ‘하나님의 예비하심, 인도하심’에 반응하는 ‘히스기야 왕의 간절한 마음’입니다. ‘죄로 말미암은 나의 죽음을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대신 받으시고, 내게 생명 주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죽음보다 강력한 생명에 대한 간절함 때문이었습니다.
네, 결국 또 우리의 중심(中心)입니다. 상황이 어떠하건, 내 상태가 어떻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나는 예수님의 은혜 없으면 죽은 자다. 죽어도 이 은혜를 놓칠 수 없다.”라는 간절함이 있다면, 은혜의 자리로 나옵니다. 예배를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 말씀과 기도가 영의 양식임을 믿고, 곱씹어 먹습니다.
3. 이 간절함, 히스기야 왕의 갈망은 멈추지 않습니다. 히스기야만 누리지 않습니다. 온 이스라엘, 남북이스라엘 모두에게 편지를 보냅니다. 5절의 “브엘세바에서 단까지”라는 표현은 ‘한라에서 백두까지’라는 표현과 같습니다. 함께 ‘유월절’을 지키자고, 감격의 제사와 예배를 드리자고 초청합니다.
6~9절의 간절한 권면을 합니다. 조심할 것은 “너희” 속에는 ‘우리’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에게 진정으로 ‘죽었던 내가 살았다’라는 경험이 있다면, 여전히 그 감격이 내 속에서 넘쳐 흐른다면 가만히 있을 수 없습니다. 말하게 됩니다. 표현하게 됩니다.
아니, 말하지 않아도 살아있기에 사람들은 놀라게 됩니다. 물어옵니다. 어떻게 살아나게 된 것이냐며 내게 묻습니다. “어떻게 되살아났습니까? 어떻게 생명얻었습니까?”라고 말입니다.
만약, 아무도 내게 ‘어떻게 되살아났는지, 어떻게 변화되었는지, 어떻게 그런 삶을 끊어냈는지’ 묻지 않는다면 진지하게 자신의 삶을 돌아봐야 합니다.
그리고 분명 나는 예수님의 은혜와 사랑, 그 생명을 체험했음에도 입을 다물고 있다면… 아무 말 하지 않고 있다면… 그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과 은혜, 생명’에 대한 감동과 감격이 사라졌다는 증거입니다.
정말 기도합니다. 간절히 기도합니다. 저와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편지’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불신자에게만 편지 되는 삶이 아닙니다. 교회 출석하는 종교생활하는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베푸신 은혜를 ‘종교와 무속’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에게 ‘내 자아가 십자가에 못 박힘으로 내가 아닌 예수로 사는 진리’가 기록된 ‘그리스도의 편지’가 되어야 합니다.
조심해야 할 것은 이런 생각을 한다고, 이런 말을 들었다고, 자신 모르게 빠지는 ‘특별함과 우월함의 함정’을 우리 모두 조심해야 합니다.
내가 먼저 십자가에 못 박힘, 나를 돌아봄이 있어야 진정한 ‘그리스도의 편지’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이 은혜와 축복이 우리의 삶에 가득하길, 그렇게 주변 모든 사람들이 ‘유월’의 은혜를 체험하게 되길 축원합니다.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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