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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진Hyung Yun

12월 09일 2020년 수요일 묵상

본문: 역대하 29장 20~36절


1. 오늘 본문을 읽으며 마음 속에 참 많은 묵상이 있었습니다. 히스기야 왕이 부럽기까지 했습니다. 다시 회복된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제사와 예배의 감격은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성도라면, 그리스도인이라면 당연히 그런 예배를 갈망하고, 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기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제발, ‘뉴저지 주님의 교회’는 종교예식, 종교행사, 종교 모임하는 곳이 아니길 기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를 붙들고 믿음으로 드리는 예배, 심령을 찢는 예배, 겸허한 마음이라는 표현으로도 모자란 낮고 낮은 마음으로 드리는 예배가 회복되게 해달라고 기도해야만 했습니다.

이렇게 기도하고, 예배를 드려도 깊은 죄성에서 올라오는 우월감, 정죄감, 비교의식, 자아도취 따위를 해결할 길이 없습니다. 저런 기도를 드릴 때는 뭔가 겸손해진 것 같지만, 결국 ‘난 이런 예배를 드리는 특별한 사람이야’라는 자기 착각, 자아 만족에 다시 빠져들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포기하지 않습니다. 또 엎드립니다. 또 십자가 앞에서 이런 저의 죄성을 붙잡고 씨름합니다. 왜냐면, 이것이 성령 받은 사람의 특징이기 때문입니다. 빛이신 성령께서 내 심령을 비추시면 내 속의 찌꺼기, 벌레보다 더 꿈틀거리는 내 속사람의 악함이 견디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 십자가의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 은 사람의 남은 삶의 과정이기 때문에, 성화(聖化Sanctification)의 과정이기 때문에 믿음으로 십자가 붙잡고 걸어야 합니다.

2. 오늘 본문 속에 나타난 히스기야 왕의 마음을 봐야 합니다. 성전을 깨끗하게 한 뒤 즉시 ‘여호와의 전’으로 향합니다. 아침 일찍 일어났다고 합니다. (21절)

제발, 이런 것을 새벽기도 드리는 것에 대한 정당성이나 우월성으로 해석하면 안 됩니다. 물론, 제가 이렇게 말했다고 새벽기도가 중요하지 않다는 뜻도 아닙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일찍 일어난 이유입니다. 다른 것이 아닙니다. 간절함입니다. 하나님께서 죄인에게 베푸신 대속의 은혜를 통한 제사와 예배에 대한 간절함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임재를 갈망하며, 하나님과 관계가 회복되기를 바라는 간절함 때문입니다. 마치, 소풍날 아침 깨우지 않아도 일찍 일어나는 아이와 같은 순전한 마음 때문입니다.

저와 여러분의 신앙생활에 이러한 순전한 마음이 없다면 큰 일 난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교회를 섬기며, 예배를 드리는 본심이 다른 데 있다면, 거기에 잡다한 마음이 섞여 있다면 빨리 십자가 앞에서 걸러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엎드려 내 본심을 점검하는 것에는 너 나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 신경 쓸 겨를이 없습니다. 직분의 문제가 아닙니다. 지위고하, 남녀노소 그 어떤 것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34절을 보십시오.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제사는 ‘제사장과 레위인들이 주관하는 것이다’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하지만, 이것은 구별된 지파, 직분을 강조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레위 사람들의 성결하게 함이 제사장들보다 성심이 있었음이라”는 것은 ‘성심(聖心), 마음, 중심(中心, inner man)의 문제를 강조한 것입니다.

이것을 원어에 가깝게 번역하면 이렇습니다. “레위 사람들이 제사장들보다 깨끗하게 하려는 마음이 더욱 바로 서 있었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드러나는 제사 행위를 하는 제사장들도, 제사와 예배를 위해 이런 저런 다른 일을 하는 레위인들도 그냥 마음만 보고 계십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건, 어떤 말을 하건, 어떤 삶을 살건, 어떤 신앙생활을 하건 그냥 묵묵히 저와 여러분의 본심만 보고 계십니다.

34절을 보면서 제 자신에게 참 많은 찔림이 있었습니다. ‘목회 혹은 목회자’라는 핑계로 정당화하는 제 마음의 판단, 다른 사람을 향한 비판에 대한 찔림이 있었습니다.

사실, 제가 가장 시달리는 것, 제 속에서 자꾸 올라오는 마음이 ‘상대방, 특히 성도님들의 신앙생태 혹은 수준(?)’에 대한 판단, 평가, 비판’입니다. 신앙생활을 점검한다, 바른 복음이 무엇이냐 등의 핑계로 이러고 삽니다.

오늘 이 말씀을 묵상하고, 함께 나누면서 “다른 사람이 아니라, 이런 제 자신을 회복시켜 주시옵소서. 제 속에 무너진 마음과 예배가 오늘 다시 회복되게 해주시옵소서.”라는 기도를 가장 먼저 했습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습니다. 36절의 기록처럼 ‘히스기야 왕’이라는 사람의 신실함이 아니라, 자기 백성을 끝까지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의지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를 회복 시키시길 작정하셨기에 ‘그 은혜를 붙드는 자’ 반드시 회복될 줄 믿습니다!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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