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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진Hyung Yun

12월 04일 2020년 금요일 묵상

본문: 역대하 25장 14~28절


1. 역대하 25장을 전체적으로 살펴보기 위해 어제, 오늘 본문인 14~16절을 함께 살펴보았습니다. 처음 시작은 좋은 듯 보였지만, 온전하고 순전한 마음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지 않았던 ‘아마샤’의 마지막은 안타까움 그 자체입니다.

이것은 ‘아마샤’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의 진리와 가치, 능력을 잘못 이해하면 같은 길을 걷게 됩니다. 이미 걷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걷고 있다면 빨리 돌이켜야 합니다.

‘에돔’에게 승리한 ‘아마샤’는 무슨 배짱에서 그랬는지 ‘북이스라엘’에 선전포고를 합니다. 17절에 ‘대면하자’라는 것은 회담, 만남, 협상 등을 위한 만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전쟁을 하자는 뜻입니다.

북이스라엘의 왕 ‘요아스’는 이런 도발을 감행하는 남유다의 왕 ‘아마샤’에 대해 경고합니다. 18절에서 북이스라엘을 ‘레바논의 백향목’으로 남유다를 ‘레바논의 가시나무’로 비교하면서 ‘너는 내 상대가 안 된다.’라는 경고를 합니다. 그리고 과거 ‘아합과 여호사밧’의 결혼 동맹을 빗대어 말하면서 이제는 그 동맹이 깨진 지 오래되었다는 것을 비유적으로 말합니다.

짧은 설명을 드리면, 17절의 ‘예후’는 북이스라엘 ‘요아스’왕의 할아버지입니다. 그는 아합과 이세벨의 후손을 죽이고 왕이 된 사람입니다. 따라서 현재 남유다와 북이스라엘의 왕가는 어떤 혈연적 연결고리도 없고, 오히려 자신은 ‘네가 생각하는 결혼동맹 싫어한다’라는 의미로 말한 것입니다.

그리고 19절에서 결정적인 이야기를 합니다. 높아질 대로 높아진 ‘아마샤’의 잘못된 마음, 교만을 지적합니다.


2. ‘아마샤’는 이 경고를 무시합니다. 결국 전쟁에 나갑니다. ‘벧세메스’는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길목입니다. 이곳이 무너지면 예루살렘은 지척입니다. (21절)

결국, ‘아마샤’는 패배하였고, 포로가 됩니다. 예루살렘 성벽은 무너졌습니다. 성젼의 귀한 물건들이 약탈당합니다. 주요 인물들이 북이스라엘에 볼모(포로)로 끌려갑니다. (23~24절)

그래도 다행?이었던 것은 ‘아마샤’는 15년 정도 더 남유다의 왕으로 있었습니다.(25절) 하지만, 결국 반란에 의해 ‘라기스’에서 죽임을 당합니다. (27절)

우리는 여기서 한가지를 좀 생각해봐야 합니다. ‘아마샤’의 이야기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이 누구일까요? 어떤 사람들일까요? 네, 남유다 사람들입니다. 그 중에서도 이후에 등극하는 ‘왕들’입니다. 26절을 기억해야 합니다. ‘아마샤’의 모든 이야기가 ‘이스라엘 열왕기’ 기록 되어 있었습니다.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아마샤의 모든 행적이 ‘이스라엘 왕조실록’에 다 기록되어 있었다.”입니다.

그럼 여러분이 하나님의 안타까운 심정, 역대기 기록자의 안타까운 심정으로 26절을 다시 기록한다면 무슨 표현을 넣으면 좋을까요? 네, “그런데, 그럼에도!”입니다.

“저 안타까운 내용이 다 기록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럼에도!’ 아무도 안 읽었다. 아니 읽어도 그냥 자기하고 싶은 대로 했다. 나 여호와가 베푼 대속의 은혜를 죽을 것처럼 붙들고 벌벌 떨며 살지 않았다. 그저 ‘나 여호와’를 자기 왕 만들어 주는 신, 영토 넓혀 유명하게 만들어 주는 신, 축복 주는 신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결국은 ‘아마샤’와 똑같은 길을 스스로 갔다. 그렇게 바벨론에게 멸망 하였고, 포로로 끌려가고 말았다.”라는 것이 26절에 녹아 있습니다.


3. ‘아마샤’라는 처음 들어보는 왕, 저 구석에 누구도 관심가지지 않은 그 왕의 스토리 속에 ‘남유다의 역사’가 함축적으로 들어 있습니다. 르호보암 때 ‘예루살렘’이 애굽 왕 시삭에게 점령 당하고 ‘솔로몬의 금방패’를 빼앗긴 이후, 처음 있었던 일입니다.

하지만, ‘예루살렘에 대한 약탈, 성벽의 무너짐, 포로로 끌려감 등’은 남유다가 바벨론에 의해 멸망 당 할 때의 사건과 너무 닮았습니다. 특히, 예레미야 52장의 전주곡 같습니다.

역대기의 기록배경을 설명 드렸습니다.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에스라’를 비롯한 남유다의 학자들이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반성의 의미를 포함하여 ‘역대기’를 기록했습니다.

“’아마샤’에 대한 기록을 한 명의 왕이라도 진지하게 관심을 가지고 똑바로 읽었더라면… 제대로 읽고 하나님의 앞에 엎드렸더라면… 그렇게 부르고 또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였더라면…”이라는 안타까움을 가지고 기록한 것입니다.

이런 말씀 드리는 것은 ‘후회’를 하라고 드리는 말씀이 아닙니다. 저와 여러분에게 ‘기록된 성경’을 주시는 이유가 있습니다. 딱 하나입니다. “이 말씀을 듣고 십자가 앞으로 나와 엎드리는 사람, 그렇게 돌이키는 사람은 누구나 생명의 길을 걷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생명으로 인도함 받게 된다.”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늦은 것은 없습니다. 오래된 것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말씀이 내 심령에 임할 때 아프고, 찔리고, 부끄러워도 살기 위해 십자가로 달려가야 합니다.

오늘도 ‘기록된 생명의 말씀’ 안에 있는 십자가 보혈로 씻어 주시고, 가려주시고, 덮어 주시는 은혜로 나가시길 축원 합니다!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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