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역대하 25장 1~13절
1. 성경을 묵상할 때마다 감사한 것이 있다면, 제 자신에게 찔림이 있다는 것입니다. 때론 인정하기 싫고 아프지만, 심령을 수술하는 칼 끝이 제 마음과 삶을 향하는 것에 감사합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아마샤 왕’의 모습은 얼마든지 제 모습이 될 수 있습니다. 전쟁에 승리한 뒤 의기양양한 모습, 그렇게 자신을 향한 돌이키라는 하나님의 안타까운 음성이 다 들리기도 전에 거절하고, 거부하는 태도는 누구에게나 해당될 수 있습니다. 이미 그러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유명한, 대단한 신앙의 인물을 신격화, 심지어 우상화 하여 그런 사람들이 받은 축복을 받으려 합니다. 그러나, ‘요아스, 아마샤’같은 잘 알려지지 않은 왕들의 삶을 보면서 자신을 비춰보려 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좀 지겨운 듯, 비슷한 듯 하지만 ‘역대하’에 기록된 모든 왕들의 삶, 그 기록을 ‘천천히 또 찬찬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이유는 저와 여러분에게 하시는 말씀이 있기 때문입니다. 16절의 안타까운 기록처럼 ‘성경에 기록된 그들의 삶을 통해 내게 아직! 말씀하고 계시는데 덮어버릴 수 없습니다. 말씀이 들릴 때 다른 사람 생각할 겨를이 없습니다.’
2. ‘아마샤’에 대한 첫 기록은 긍정적으로 보입니다. 3~4절에 기록된 ‘아마샤’의 행동은 옳은 것입니다. 아버지를 암살한 자들을 죽여야 했습니다. 그래야 나라의 기강과 법이 서기 때문입니다. 무조건 용서를 강요할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 그가 잘 한 것은 아버지를 죽인 자들에게만 죄를 물었다는 것입니다. 암살자들의 자녀는 죽이지 않았습니다. 범죄의 당사자에게만 죄를 물은 것입니다. 신명기 24장 16절의 말씀을 지킨 것입니다.
어떤 일에 대하여 객관적이고, 제한적인 판단이 중요합니다. 또한 어떤 사건이 발생하거나, 어떤 일을 접했을 때 감정과 선입견이 작동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사건에 대하여 말씀하시지만, 사탄은 사건을 대하는 우리의 감정을 자극합니다.
이런 모습을 보여주었던 ‘아마샤’가 자신의 죄악을 지적하는 ‘선지자’를 향하여 보여준 태도는 믿기 어려울 지경입니다. 감정이 폭발해버린 그의 모습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3. 따라서, 우리는 아마샤에 대한 이런 안타까움과 의문(?)을 가지고 5~13절에 기록된 ‘소금 골짜기 전투(에돔과의 전쟁)’의 과정을 찬찬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그가 병력을 준비할 때의 모습을 보십시오. ‘은 백 달란트(3.4 ton)’이라는 엄청난 금액을 지불하고 북이스라엘에서 용병을 모집합니다. 이미 30만이라는 병력이 있음에도 10만명을 더 고용합니다. 적절히 사람의 생각과 방법을 섞은 것입니다.
물론, 이런 잘못을 지적하는 선지자의 말을 듣고 북이스라엘의 용병을 돌려보냅니다. 결국 이들은 돌아가는 길에 학살과 약탈을 자행합니다. 왜냐면, 이들이 전쟁에 참전한 목적은 ‘은 백 달란트’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약탈이었기 때문입니다. 고대 전쟁은 약탈을 통해 전쟁비용을 충당했습니다. 점령지에 대한 약탈을 미끼로 군대를 모집하고, 사기를 올리기도 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아마샤’의 전쟁 목적입니다. ‘아마샤가 에돔과 전쟁을 한 이유, 동기가 무엇이었을까?’라는 생각을 가지고 다시 읽어보십시오.
아마샤가 전쟁을 시작한 것은 침략에 대한 방어가 아니었습니다. 먼저 시작했습니다. 물론, 에돔이라는 전쟁의 불씨를 제거하기 위한 ‘예방 전쟁(?)’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8~9절을 문자 그대로가 아니라, 성경 전체에 흐르는 하나님의 마음으로 읽어야 합니다. 8절의 “힘써 싸우소서”가 무슨 뜻일까요? 물리적 전투를 열심히 하라는 것만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긍휼하신 하나님의 본성, 살리시려는 하나님의 마음에 기대어 전쟁을 하라는 뜻입니다. 군사력의 강대함이 아니라, 군대를 통해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드러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12절의 잔인한 짓을 합니다. 그 많은 사람을 절벽에서 밀어 죽입니다. 율법대로라면 ‘에돔’을 먼저 공격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에돔을 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출애굽 당시 ‘에돔의 길’로 지나가려는 것을 에돔 왕이 거절하자 아무 말하지 않고, 그냥 빙 돌아갔습니다. (민20:14~21)
8절에 선지자의 말 “왕이 만일 가시거든 힘써 싸우서서”의 ‘만일’과 ‘힘써’를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만일’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가급적 하지 말라는 것이며, 마지 못하는 허락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4. 하나님을 향한 ‘아마샤’의 깊은 마음의 본심과 동기는 9절에 있습니다. “능히 이보다 많은 것을 주실 수 있나이다”라는 말을 자기 본성과 죄성으로 받아들인 것이 문제입니다. 아니, ‘이 말을 듣고 싶었다.’라고 표현하는 것이 맞습니다.
“‘은 백 달란트’의 손해를 더 많은 것으로 갚아 주실 것이다.”라고 이해한 것입니다. 그 말이 너무 듣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전투에서 1만명을 죽인 뒤 얻는 전리품도 챙기고, 1만명을 학살한 뒤 남겨진 것들도 챙긴 것입니다. 약탈을 위한 전쟁의 끝판을 보여준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이보다 많은 것을 왕에게 주신다’는 것의 방법과 결과물을 자기 식으로 해석한 사람이 저지른 통탄스런 결과를 명심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승리와 약탈에 취해서 가지고 들어온 에돔의 우상들을 기억해야 합니다. (14절) 이후 보여 준 그의 오만한 태도(16절)를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이 말씀 앞에 다른 사람이 떠오른다면 큰 낭패입니다. 돌아가면서 약탈을 저지른 북이스라엘의 용병들 보다 ‘아마샤’가 더 했다는 것을 잘 생각해보십시오.
참 많은 사람들이 자기 욕망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의 이름과 축복으로 포장합니다. 자아실현을 위한 도구로 십자가 복음과 성경을 아름다울 정도로 교묘히 이용합니다.
그래서 오늘도 우리는 말씀에 찔림 받아 다시 십자가 앞으로 가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을 따라 내 심령이 십자가에 못 박힌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은 살았습니다!!!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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