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역대하 24장 4~16절
1. 오늘 본문은 ‘요아스 왕’이 성전을 수리하고, 여호와께 드리는 제사를 회복하는 내용과 ‘여호야다’의 죽음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기록된 ‘성전 수리 및 보수’는 칠 세에 왕위에 오른 ‘요아스 왕’이 성장하여 실시한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여호와의 성전’을 수리한 것은 장성하여 진정한 남유다의 왕이 된 ‘요아스’가 행한 귀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왕이 되어 스스로 결정한 첫번째 귀하고, 아름다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왜냐면, 그가 장성하기 전까지 ‘대제사장 여호야다’가 섭정(攝政, regency)을 했습니다. 3절을 통해서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왕의 결혼은 아무나 간섭하거나 주관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6절의 기록처럼 ‘대제사장’이라고 기록된 것으로 보아 반정 이후 ‘여호야다’는 제사장에서 대제사장으로 추대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요아스 왕’이 행한 ‘성전 수리’는 어떤 면에서는 시간이 지체된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도 듭니다. ‘대제사장 여호야다’가 빨리 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하지만, 긍정적인 시각으로 볼 때, ‘대제사장 여호야다’가 기다렸던 것으로 보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대제사장 여호야다’가 ‘성전 수리’에 관여하지 않음으로 자신이 지켜야 할 선을 지킨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막대한 건축 비용이 들어가고, 사람들의 노동력을 동원해야 하는 ‘성전 수리 및 보수’는 백성을 다스리는 권세를 하나님께 부여 받은 ‘왕의 고유 권한’이라고 여겼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정치와 종교가 일치된 국가였지만, 동시에 정치와 종교가 분리된 국가였습니다. 왕은 결코 제사장의 자리에 서면 안 됩니다. 제사장 또한 왕의 권한을 넘봐서는 안 됩니다.
여호야다 제사장은 이런 점을 철저히 지킨 것입니다. 장성한 요아스 왕이 자신을 불러 ‘성전 수리’가 지지부진한 것을 다그칠 때도 겸손히 대답합니다. (7절)
2. 네, 그 옛날 ‘솔로몬의 모습, 제단 앞에서 백성들을 마주하여 손을 들고 기도하던 솔로몬의 모습’과는 완전히 다른 태도입니다.
이런 ‘여호야다’의 기다림, 자기 절제가 있었기에 ‘요아스 왕’이 스스로의 결정과 결단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한마디로, ‘성전 보수 및 수리’라는 가장 급하고, 가장 거룩하고, 가장 좋아 보이는 그 일을 ‘한 영혼, 요아스’를 위해 기다렸던 것입니다.
하나님에게 부여 받은 것이라고, 하나님이 내게 허락하신 것이라고 내 맘대로 하는 것처럼 위험한 것이 없습니다.
특히 ‘한 영혼, 인격체’를 향한 하나님의 간섭과 계획을 나의 계획, 원함, 급함, 의로움 때문에 망쳐버릴 수 있습니다. 스스로 십자가 앞에 서서 하나님과 대면하여 그 고민, 힘듦, 아픔, 어려움 등을 넘어갈 수 있는 ‘영적 근육’을 기르지 못하도록 할 수 있습니다.
제 자신도 항상 이런 부분에서 조심하고 고민합니다. 목회를 하면서 성도님들을 대할 때도, 또 아이들을 기를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저의 간섭? 혹은 가르침의 한계로 늘 갈등합니다.
하나님께서 한 영혼을 십자가로 부르셨다는 것은 구원과 관련된 것 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그 복음을 붙들고 매일 매순간 내 앞에 있는 것들에 대해 자기 책임, 자기 결정을 감당하는 칼날 같은 결단을 해야 한다’는 것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3. ‘요아스 왕’은 ‘여호야다’라는 기다릴 줄 아는 멘토, 자신의 손에 주어진 힘과 능력을 절제하여 사용할 줄 아는 멘토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의 기다림과 절제의 결과로 잘 성장했습니다. ‘대제사장 여호야다’가 죽은 뒤 안타까운 모습을 보이지만, 스스로의 결단과 결정으로 성전을 수리하고 보수했습니다. 여호와께 드리는 번제’를 다시 회복시킵니다.
우상숭배와 타락의 처참한 결과로 무너진 성전과 여호와를 향한 대속의 제사를 다시 회복시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특히 9절의 “이스라엘에게 정한 세”는 ‘생명의 속전’입니다. “내가 살아온 것, 살아 있는 것, 살 수 있는 것은 대속 은혜를 통해 주신 생명 때문입니다.”라는 믿음의 고백으로 드리는 의무세입니다. 예외 없이 드리는 것입니다.
무너진 여호와 신앙 가운데 이런 의무세를 회복시키고, 그 돈으로 성전을 수리한다는 것은 왕이라도 쉽게 결단하여 추진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요아스 왕’이 스스로 결단과 개혁의 자리까지 갈 수 있었던 것은 ‘대제사장’이라는 막강한 힘과 영향력을 가졌으나 하나님 앞에서 기다림과 절제로 인내하며 자기를 내려놓았던 ‘여호야다’ 가 있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에수님의 십자가도 기다림과 절제, 자기부인(自己否認, self-denial)의 결정체였습니다. 그렇게 우리를 살리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매 순간, 매 번의 결정 앞에서 ‘십자가의 절제, 기다림, 자기 부인’을 붙들어야 할 줄 믿습니다.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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