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사사기 4장 11~24절
1.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제 심령에 비출 때 안도(?)할 때가 있습니다. 감춰둔 제 심령의 껍데기가 벗겨져 나가는 아픔을 느낄 때입니다.
아프다고 거기에서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살고 싶어 가던 길을 돌이킵니다. 자아의 옳음에 속아넘어간 나를 되돌려 세웁니다. 다시 십자가, 그 은혜의 장막 아래 영혼 굴복시킵니다. 아니, 파묻어 버립니다.
이런 마음으로 ‘드보라 사사(Judge)’에 대한 성경의 기록을 읽습니다. ‘위대한 여자 사사’라는 인간이 붙인 수식어를 떼어 내고 읽습니다. 하나님을 대적한 ‘하솔 왕, 야빈’과 그의 군대장관 ‘시스라’라는 자기 의로움에 가득한 고정관념을 버리고 읽습니다.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하솔 왕, 야빈’에게 통치를 당한 이유는 이스라엘 자손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서 악을 행했기 때문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또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 언약 안에 있는 대속의 은혜를 버렸기 때문입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살고 싶어 하나님 아닌 것을 쫓아갔기 때문입니다.
2. 따라서 우리는 인간의 구부러진 생각, 자아에 기울어진 생각을 십자가에 못 박고 이 말씀을 읽어야 합니다.
‘시스라’는 죽어 마땅한 절대 악인이 아닙니다. 아직도 ‘시스라’를 보면서 ‘하나님을 대적하다가 여인의 손에 부끄러운 죽음, 끔찍한 죽음을 맞이한 사람’으로 생각한다면 ‘유교적, 무속적 사고’에 붙들려 있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이런 사람은 가능성이 있는 사람입니다. 소망이 있는 사람입니다. 은혜 안에 있는 사람입니다. 성령의 비춰주심과 인도하심이 무엇인지 눈꼽만큼이라도 경험한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일까요? 네, ‘땅바닥에 관자놀이가 꿰뚫려 죽은 시스라’가 부러운 사람입니다. 물론, 심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 반발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하지만, 말씀을 가만히 보십시오.
3. 오늘 본문을 보면서 ‘헤벨’의 가문(?)에 너무 마음 빼앗기지 마십시오. ‘모세의 장인 호밥의 자손과 결혼한 용감한 여인’이라는 것을 지나치게 강조하면 하나님의 음성은 들리지 않습니다. 여자 성도님들의 헌신과 용맹(?)을 부추기는 결과만 초래합니다.
그 강력하고 대단했던, 철병거 부대를 지휘했던 ‘시스라’를 생각해보십시오. 대단한 것을 누리며 휘두르던 장군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결국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내려야 했습니다. 내려서 걸어야 했습니다(15절). 걷는 정도가 아니라, 땅바닥에 내리 꽂혀야 했습니다(21절).
우리가 여기까지 묵상이 될 때, 비로서 말씀을 통해 십자가를 발견하게 됩니다. 가던 길을 되돌려 십자가 은혜에 심령을 못 박으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4. 자신이 자랑했던 철병거에서 내려 허겁지겁 도망치는 것은 비참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내려야 합니다. 그렇게 떵떵거리고, 누리던 모든 것에서 내려와야 합니다. 십자가 앞에서는 처절한 영혼의 나체로 서야 합니다. 나 때문에 예수님도 벌거벗으셨는데, 어찌 우리가 껍데기를 둘러 싸고 십자가 앞에 설수 있겠습니까?!
십자가로 돌이키라는 그 음성을 거절하면 안 됩니다. 18절의 “들어오소서”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sur’의 뜻은 ‘가던 방향을 바꾸어 돌이키다’라는 의미입니다.
물론,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가던 길을 돌이켜 장막으로 들어간 시스라는 죽은 거 아니냐.’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성도라면, 십자가에서 나 대신 죽으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영원한 생명을 얻은 하나님의 자녀라면, ‘병거에서 내려, 가던 길을 돌이켜 장막에서 죽음을 맞이한 시스라’가 다르게 보여야 합니다.
5. 세상을 향하여 호령하며 살아가다 이 땅을 떠나는 것도 참 멋진(?)일입니다. 그러나, 그런 삶이 남긴 결과가 어떤 것으로 돌아올지에 대해서는 저도 모르겠습니다. 긍정적일지 부정적일지 장담은 못하겠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강력한 철병거 같은 어떤 것(이렇게 완곡히 표현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생각하는 ‘그것’입니다.)을 얻어서 맘대로 휘 젖기 위해 살아가던 내가 십자가에서 돌이킨 삶의 결과는 다릅니다. 십자가에서 죽은 자로 살아낸 삶의 결과는 달라도 너무 다릅니다. 반드시 ‘생명의 결과, 부활의 결과, 은혜의 결과’로 돌아옵니다.
우리 모두, 이제 그만 자아의 꼭대기에서 내려옵시다. 자기를 만족시키기 위한 모든 것에서 내려와 돌이킵시다. 그리고, 십자가로 뚜벅뚜벅 걸어가는 ‘영혼의 뚜벅이’가 됩시다.
그 걸음의 끝에 눈물로 거둔 모든 ‘믿음의 열매’를 ‘놀람’으로 맛보게 되길 축원합니다.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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