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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진Hyung Yun

11월 4일 2021년 목요일 묵상

본문: 사사기 2장 1~10절


1. 오늘 본문을 지나면 본격적으로 ‘사사기’의 기록이 시작됩니다. ‘사사기’와 ‘여호수아서’의 연결부분의 마지막 기록은 ‘보김’에 나타난 ‘보김’이라는 곳에서 일어난 사건(1~5절)과 ‘여호수아’의 죽음(6~10절)에 대한 기록입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여전히 그대로’라는 것입니다. ‘보김(히브리어:울다)’에서 그렇게 통곡했지만 그들은 ‘그대로’입니다. ‘여호수아의 죽음’ 앞에서도 ‘그대로’입니다.

연결되는 11절 이하의 기록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바알들을 섬기며…”라는 말이 가슴에 저며 듭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인간의 언어적 한계 그 중에서도 문자 기록의 한계 속에서 다 깨달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가만히 곱씹어보면 보입니다. 그들의 이야기를 통해 저와 여러분에게 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2. 우리는 7절을 보며 자칫 ‘여호수아’라는 사람 지도자의 생존 여부에 마음이 기울어집니다. 위대한 지도자가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하나님을 버리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린 것입니다. (엄격하게는 그냥 틀린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그냥 사람입니다. 만약, 그에게 특별함(?)이 있다면 끝까지 ‘하나님의 언약, 그 속에 있는 대속의 은혜’를 끝까지 붙들었다는 것뿐입니다.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여호수아 24장 15절)”는 그의 고백은 ‘최고로 힘 센 신적 존재’를 숭배하겠다는 종교적 의미가 아닙니다.

“나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대속의 은혜 아니면 죽은 자입니다. 가나안의 풍요 따위는 내 관심이 아닙니다.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입니다. 내 평생 보고, 경험한 ‘여호와 하나님의 큰 일’은 이것입니다. ‘언약 안에 있는 자에게 베푸신 생명의 일, 구원의 일’입니다!!! 제발, 이런 나와 우리를 선대하시는 ‘하나님의 큰 일’을 착각하지 맙시다.”라는 고백입니다.


3. 이 마음으로 ‘보김’에 나타난 ‘여호와의 사자’가 한 말을 다시 보십시오. “내가 너희와 함께 한 언약을 영원히 어기지 아니하리니”(1절) 네, 하나님은 단 한번도 그들과 맺은 언약을 어기거나 파기하신 적이 없습니다. 여호와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언약의 신실성을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언약을 어긴 것은 이스라엘 입니다. 우리입니다. 그럼, 어떤 형태로 어겼을까요? (이게 중요합니다.)

2~3절의 “이 땅의 주민과 언약을 맺지 말며… 그들이 너희 옆구리에 가시… 그들의 신들이 너희에게 올무가 되리라…”를 보면서 이렇게 이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오직(특별한~) 우리 이스라엘과만 언약을 맺었는데, 그 귀하고 귀한 언약을 ‘이 땅의 주민(이방인)들’과 맺는 바람에 이 끔찍한 일이 벌어졌다. 그 대표적인 사건이 ‘기브온 주민과 언약을 맺은 것(여호수아 9장)’이다. 그들을 ‘나무 패고, 물 긷는 사람’으로 남겨두는 바람에 그랬다.”라고 생각합니다. (‘나무 패고, 물 긷는 사람들’이 이후 성전 봉사자인 ‘느디님 사람들’이 되었다는 것은 수차례 나눴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정도가 아니라 교묘한 자기 책임 회피입니다. 더 위험한 착각입니다. 문제를 자신에게서 찾지 않고, 남에게 핑계를 돌리려는 인간 죄성의 근본성향(창세기 2장, 인간 타락 후의 반응!)입니다. 이 못된 버릇을 십자가에 못 박지 않고 본문을 보면, 하나님의 마음이 안 보입니다.

2절의 “너희는 이 땅의 주민과 언약을 맺지 말라”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베푸신 언약 안에 있는 대속의 은혜를 버리고, 이방신들과 언약을 맺지 말라’는 뜻입니다. 이방신들이 약속한 ‘풍요와 안락’을 쫓아 ‘죽음의 언약’을 맺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지금은 그럴 듯 하게 보이지만, 이방신들과 언약을 맺은 ‘그들’과 ‘그들의 신들’은 결국 ‘옆구리의 가시와 올무’가 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무엇보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통해 ‘이방인들(가나안 족속)’도 ‘여호와 하나님께서 베푸신 생명의 언약’ 안에 들어오길 바라셨습니다. 누구를 통해서요? 네, 먼저! 언약을 맺도록 허락하신 ‘이스라엘 백성들’을 통해서…!


4. ‘보김’, 그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습니다. ‘실로’와 ‘벧엘’ 사이로 추정합니다. 위치 그 자체에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곳에서 다시 이스라엘 백성들을 만나 주셨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성막’이 있는 ‘실로’에서 ‘여호와의 사자’가 온 것이 아니라, ‘길갈’에서 왔다는 사실입니다. ‘길갈’, 어쩌면 버려진 장소입니다. 잊혀진 곳입니다. (지금도 ‘길갈’로 추정되는 곳에는 ‘모래 바람’만 휘날릴 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길갈’을 기억하십니다. 왜 그럴까요? 그곳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죽었기 때문입니다. ‘할례’를 받고 자신들의 생명, 전 존재를 하나님께 드린 곳이기 때문입니다. ‘대신 죽음’은 ‘면책, 면피’가 아니라, 진짜 ‘나의 죽음’이라는 것을 실존적으로 인정한 곳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서 나대신 예수님께서 죽으셨다는 것은 내가 죽은 것입니다.’ 이것이 영혼 깊이 인정되면 ‘예수님께서 나 대신 사시는 것’이 실제로 드러납니다. 그러면, 도저히 그렇게 살 수 없습니다. 여전히 그렇게 산다면 아직… 아닌 겁니다.

그래서 우리 다시 십자가를 붙잡고, 내 맘대로 결정해도 아무 문제 없었던 그 일부터 하나님 앞에 아뢰며 ‘내 생각 반대로’ 행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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