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사사기 1장 22~36절
1. ‘사사기 1장 1절~2장 10절’은 ‘여호수아서’와 ‘사사기’의 연결고리입니다. 다리 같은 역할을 합니다. 표면적으로 살펴보면 ‘빼앗은 지파’와 ‘빼앗지 못한 지파’를 비교해 놓은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이 속에 담긴 하나님의 마음은 단순하지 않습니다. ‘빼앗고, 점령한 지파는 칭찬하고, 그렇지 못한 지파는 책망하는 내용’으로 이해한다면 하나님의 마음을 단단히 오해한 것입니다.
어제 읽으셨듯이 ‘유다 지파’가 대단한(?) 지파로 등장합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담대하게 가나안 족속을 물리치고 땅을 정복합니다. 분배 받은 땅을 한치의 오차도 없이 다 차지합니다. 게다가 다른 지파(시므온, 베냐민)를 도와줍니다. 함께 합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는 ‘요셉 가문(므낫세와 에브라임 지파)’가 등장합니다. ‘요셉 가문’은 80점쯤 되는 것 같습니다. 22~26절을 보면 100점인데, 27~29절 때문에 평균이 낮아졌습니다. 나머지 지파들은 겨우 낙제를 면한 수준이던지, 낙제입니다.
2. 정말 이 기록은 각 지파들의 ‘가나안 정복 성적표’일까요? 물론 맞습니다만, 조금만 더 살펴보십시오. 이런 내용을 잘못 이해하면, 우리도 모르게 각 지파의 순위(?)를 정합니다. 특히, ‘예수님’께서 ‘유다 지파’를 통해 오신 것을 족보 혹은 혈통에 지나치게 치우쳐 이해하게 됩니다.
실제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에서 ‘각 지파의 주도권 다툼’은 끊이지 않았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남북 이스라엘의 분열’입니다. 북이스라엘을 세운 중심 지파가 ‘에브라임’입니다.
게다가 ‘사사기’ 전반에 흐르는 주권 다툼의 중심에는 ‘요셉 지파’ 즉 ‘에브라임 지파’와 ‘므낫세 지파’가 있었습니다. (‘사사기 6~12장, 기드온~입다’)
3. 하나님께서는 냉정하리만큼 담담하게 있는 그대로 ‘이스라엘 민족의 본 모습, 종교적 정당성을 이용하여 모든 것의 주도권을 장악하려는 인간의 욕망, 머리 되고 싶은 자아의 본성’을 ‘사사기’를 통해 기록하셨습니다.
암울하지만, 읽으라고 기록하셨습니다. 그 기록을 읽으며 성령의 비춰 주심 따라 자기 속에 감춰진 본성 보라고 기록하셨습니다.
그 섬뜩한 내 모습을 발견하고 절망한 저를 어둠에 방치하지 않으시려고 기록하셨습니다. ‘이런 내가 살 수 있는 유일한 소망! 십자가를 붙들라’고 기록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사사기’ 그 암울한 기록의 중심에 소망이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이런 나를 ‘선대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은혜’라고 밖에는 표현할 수 없는 ‘은혜’)’를 붙들라고 말씀하십니다.
4. ‘사사기’의 서론이면서, ‘여호수아서’와 ‘사사기’를 이어주는 연결부분에 기록된 내용의 핵심은 24절입니다.
“이 성읍의 입구를 우리에게 보이라 그리하면 우리가 네게 ‘선대’하리라!”이것이 무슨 말일까요? ‘선대(mercy)’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우리가 잘 아는 ‘헤세드(chesed)’입니다.
네, ‘은혜, 자비, 긍휼 등’ 하나님께서 범죄한 인간에게 베푸시는 무조건적 사랑과 은혜를 말합니다. 인간의 언어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하나님의 어떠하심, 아름다우심, 긍휼하심, 은혜로우심’이 녹아 있는 단어입니다.
간혹 이런 경우를 보았습니다. 24절에 ‘요셉 지파’가 베푼 ‘선대’는 인간적인 의미의 ‘잘해주는 것’ 수준이라는 해석을 하기도 합니다.
물론, 그렇게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22~26절의 기록과 27~29절의 기록의 차이가 있습니다. 처음엔 ‘요셉 지파’라고 기록합니다. 그러나 27절 이후엔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구별해서 기록합니다.
이 속에 담긴 의미가 무엇일까요? 네, “함께”할 때는 잊지 않았습니다. 무엇을 잊지 않았습니까? “선대하시는 하나님, 무엇보다 ‘우리를 선대하시는 하나님’을 잊지 않았습니다.
5. 즉, ‘하나님의 헤세드(chesed)’는 ‘하나님의 헤세드(chesed)’를 입은 사람들을 통해 흘러간다는 진리를 잊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함께한 ‘요셉 가문’을 통해 흘러간 ‘하나님의 헤세드(mercy)’를 입은 사람들, 그렇게 생명을 보존한 사람들은 ‘헷 사람들의 땅’으로 떠났습니다. 이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헤세드’가 거기까지 영향을 미쳤다는 뜻입니다.
제발, ‘헷 사람들의 땅’을 무작정 ‘이방인들의 땅’이라고 폄하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되면 ‘이방인’에게까지 허락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어떻게 설명해야 합니까? 구약시대에 혈통적 이스라엘이 아닌 경우라도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된 사례는 많습니다.
네, 짐작하셨을 것입니다. ‘헷 사람 우리아(사무엘하 11장)’입니다. 이스라엘로 귀화한 이방인(헷 사람)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과 다윗 왕에 대한 그의 신실함(삼하11:11)에 대해서는 잘 알려진 것입니다.
우리는 ‘이방인의 땅’같은 ‘세상’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그 선대하심(chesed)’을 입은 자들입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너무 쉽게, 너무 많이 ‘은혜(chesed)’라는 말을 내뱉아서 그런지 ‘은혜를 입은 자’에 합당한 삶은 살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은혜를 입은 자의 마음, 그 낮은 영혼의 태도’가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다시 우리의 마음을 십자가 앞에서 점검합니다. 높아진 우리의 마음이 무너져야 ‘나를 살린 여호와 하나님의 헤세드’가 거기에, 그 사람에게 흘러 들어갈 줄 믿습니다!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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