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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진Hyung Yun

11월 2일 2021년 화요일 묵상

사사기 1장 11~21절


1. 다시 ‘사사기’의 긴 여정 앞에 섰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의 양식이기에 ‘반복’이라는 말을 쓸 수 없습니다. 생명이 있다면 식사가 지겨울 수 없습니다. 생명에 대한 간절함이 있다면 매일 주시는 ‘생명의 양식(만나)’를 향해 ‘이 박한 음식’이라는 말을 할 수 없습니다.

이런 마음으로 저 역시 다시 ‘사사기’를 펼칩니다. 뭔가를 기록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밀려옵니다. 그러나, 다시 말씀 앞에 엎드려 저를 굴복시킵니다. 십자가 끝을 철필 삼아 제 심령에 말씀을 새깁니다.


2. 우리도 모르게 인간의 언어적 한계 속에서 ‘가나안 정복 혹은 정착’이라는 말을 이해합니다. ‘사사기’혹은 ‘여호수아’를 읽을 때 이것을 염두에 두고 마음을 열고 읽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여호와 하나님의 언약’이 ‘이스라엘 민족’이라는 한 특정한 집단에 국한되고, 허락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좀 거슬러 올라가지만, ‘여호수아 7장’의 ‘기브온 사건, 기브온 주민들과 언약’을 맺은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 속에 담긴 하나님의 본심을 읽어야 합니다.


3. 특히, 이방인들이 이스라엘 백성을 유혹하고 타락시켰다는 ‘자기 책임 회피적 관점’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이방인들을 물리적으로 내쫓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들의 유혹을 하나님 말씀으로, 하나님 은혜 안에서 이겨내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세상은 우리 곁에 있습니다. 아니, 우리는 세상 속에 살아갑니다. 세상을 내쫓을 수 없습니다. 세상과 격리되어 살 수 없습니다.

나는 여전히 세상 속에 살지만, ‘하나님의 언약’안에서 구별된 삶! 이런 나를 변화시킨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이 세상으로 흘러 들어가야 합니다. 내가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변화시킨 복음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질문이 필요합니다. “십자가 복음, 하나님의 말씀은 죽어가는 세상을 변화시키는 능력과 생명인데, 내가 십자가에서 흐르는 복음을 막고 있는 가림막이 아닌가?”라는 진지한 자기 질문이 필요합니다.


4. ‘사사기’ 속에 나타난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이 그랬습니다. 가나안에 흘러 들어야 할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막고 있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대속의 은혜, 그 생명을 ‘민족 종교(유대교)’로 바꿨습니다.

종교로 바뀌니 가나안 땅에서 누릴 축복을 누가누가 더 주는지 기웃거리다가 ‘이방종교’를 따라갔습니다. 교묘히 뒤섞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혜와 생명의 순수성’을 오염시켰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그 순수성을 지킨 한 사람이 나옵니다. 바로 ‘옷니엘’입니다. ‘옷니엘’을 향해 ‘이스라엘의 차세대 지도자’라는 거창한 수식어를 빼고 볼 필요가 있습니다.

5. ‘옷니엘’은 ‘드빌(기럇세벨)’을 빼앗은 용감한 사람이 맞습니다. 그런데 그가 ‘드빌’을 쳐서 점령한 이유는 너무 단순합니다. ‘악사(갈렙의 딸)’ 때문입니다. 시쳇말로 ‘팔불출’입니다.

이 말씀을 엉뚱하게 적용해서 ‘밑도 끝도 없이 아내를 사랑하자’라는 식으로 해석하면 곤란합니다. ‘옷니엘’의 마음 속에 있는 ‘한 가지’를 향한 ‘순수성’을 발견해야 합니다.

‘옷니엘’은 대단한 장인의 뒷배경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혹시 ‘드빌’을 점령하면… ‘악사’ 얻고, 든든한 처가의 지원도 받고… ‘드빌’도 얻을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네, 그의 발걸음을 보면 압니다. 이스라엘에서 가장 험한 곳, ‘남방(네게브 사막)’으로 가라는 장인의 명령(15절 “아버지께서 나를 남방으로 보내시니…”)에 두말하지 않고 순종합니다. ‘드빌’을 빼앗은 자신의 전공에 대해 운운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악사’가 뭔가를 달라고 합니다. 물론, 이 속에도 영적 의미가 있습니다.)

당연히 얻을 수 있는 것, 당연히 누릴 수 있는 것, 당연히 그래도 되는 것이 사라졌을 때, 그 사람의 본심을 알 수 있습니다. 나와의 관계 속에서 무엇을 바라고 따라왔는지 그대로 드러납니다.

6. 저는 ‘옷니엘’을 볼 때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들고 있는 제 본심을 점검합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내가 바라는 것이 진짜 무엇인지를 돌아봅니다. 그걸 점검하고 돌아보지 않으면 변하기 때문입니다.

‘옷니엘’… ‘드빌’에서의 ‘화려한 개선행진’이 아니라, 사랑하는 아내 ‘악사’와 함께 조용한 그곳! 고요한 그곳! 그러나 거칠 디 거친 ‘남방(네게브)’로 떠나는 ‘옷니엘’을 마음으로 그려봅니다.

예수님을 믿은 뒤 오히려 거친 남방을 걷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드십니까? 그것은 기회입니다. 그 속에서 예수님을 향한 오염된 내 마음이 걸려지는 기회입니다.

예수님 믿어 내가 원하는 인생의 정점을 맛보려는 마음을 버려도 됩니다. 아니, 버려야 순수함이 회복됩니다.

오늘 하루 그저 단순하리만큼 순수한 마음으로 예수님을 향해 ‘온 맘 다해 사랑합니다.’라는 영혼의 고백이 넘쳐나길 축원합니다.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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