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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진Hyung Yun

11월 25일 2020년 수요일 묵상

본문: 역대하 20장 1~19절


1. 역대하 20장은 모압, 암몬, 마온(에돔) 연합군이 남유다를 침공해 온 기록입니다. 이 세 민족은 남유다의 동쪽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출애굽 때부터 호시탐탐 이스라엘 민족을 노리고, 공격했던 민족들입니다.

오늘 본문에 기록된 가나안 지역 연합군과 남유다의 전쟁은 18장에 기록된 아람(길르앗라못 전투)과의 전쟁과 사뭇 다릅니다. 대조적입니다.

18장에서는 ‘북이스라엘의 아합’과 연합군을 이루어 싸웠습니다. 인간의 욕심과 욕망에 근거한 계략과 책략이 가득했습니다. 그러나, 20장의 전쟁은 ‘가나안 연합군’에 ‘남유다’ 홀로 맞섰습니다. 여호와 하나님만 의지한 채 홀로 가나안 연합군을 대적했습니다.

특히, ‘여호사밧의 기도’에 시선이 멈춥니다. 직접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합니다. 18장의 모습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선지자를 불러서 대신 물으려 했던 그때의 모습이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기도는 직접해야 합니다. 목회자 혹은 소위 기도의 능력 있다는 사람들을 찾아다니고, 기도 부탁에 의존하는 것은 좋은 신앙의 태도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런 식으로 기도 요청하고 사람의 입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묻는 식의 행위는 무속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엄격히 말하면 ‘묻는다’는 자체가 그것을 하면 안 된다는 것을 스스로 알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물론, 자기 판단만을 가지고 맘대로 결정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신앙의 조언을 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를 부탁하는 이유, 기도를 요청하는 목적’의 순수성을 스스로 점검해야 합니다. “이것을 그토록 원하는 내 본심을 깨닫게 해주십시오.”라는 자신의 간절한 기도, 영적 몸부림을 거친 뒤 ‘기도제목’을 나누고, ‘기도요청’을 해야 합니다.

2. 오늘 본문을 읽으며 ‘적의 공격, 위기의 상황, 환란의 엄습’ 앞에서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을 의지해야 한다. 그 분께 기도해야 한다. 사람의 힘이 아닌, 하나님의 능력만을 붙들어야 한다.’라는 것을 모르지 않을 것입니다.

3~4절의 기록처럼 절체절명의 위기 앞에 ‘하나님 앞에 엎드려 오직 여호와의 얼굴을 구해야 한다. 온 백성이 함께 금식을 선포하며 목숨을 걸고 기도해야 한다.’라는 것을 부인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럼 무엇이 문제입니까? 네, 알기만 안다는 것입니다. 알기는 아는 데 그렇게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호사밧 왕’이 달라진 것이 이것입니다. ‘아는 것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실제로 그렇게 합니다. 이전에 보여주었던 모습과 다른 모습입니다. 왕의 체면 따위가 문제가 아닙니다. 백성들과 함께 엎드렸습니다. 군대를 먼저 출전시키기 전에 “여호와의 전 새 뜰 앞에” 엎드려 기도했습니다. (5절)

3. 이런 질문을 해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하나님께서 택한 남유다의 왕이라면 이런 행동은 당연한 것 아닌가, 적군 앞에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 아닌가?’라는 질문 말입니다.

하지만, 생각보다 이런 기도를 보기 힘듭니다. 역설적이게도 가장 기도를 많이 했을 것 같은 ‘왕 혹은 제사장들’의 기도를 성경에서 발견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또한 전쟁 혹은 위기의 상황에서 왕이 온 백성들과 함께 엎드려 기도한 것은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솔로몬도 종교 행사에서 거창한(?)기도를 드린 기록은 있지만, 위기의 상황에서 모두가 보는 가운데 엎드려 간절하게 하나님께 구한 기록은 거의 없습니다. 그 ‘히스기야 왕’도 성전에서 벽을 향하여 홀로 기도했습니다. 물론, 다윗은 왕이 되기 전에 광야와 아둘람굴에서 기도했습니다.

왕들은 왜 그랬을까요? 사람의 눈 때문입니다. 가장 힘있는 존재로 백성들에게 비춰져야 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해서 전쟁에서 이기고, 형통한 국가를 만들었더라도 칭송과 권위는 자기가 받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통치가 수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이용하여 존귀, 영광, 권세를 자기가 누리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것이 인간의 한계입니다. 어떻게 해서 든 자기를 드러내고 싶은 ‘자아실현의 욕구’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종교 생활을 오래할 수록, 신앙 좋다는 말을 들을 수록 더 교묘하게 ‘자아를 종교로 포장’할 수 있는 것이 인간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서 ‘여호사밧 왕이 대단하다. 여호와 하나님만을 의지하니 승리했다’라는 수학 공식 같은 결론만을 이야기하고 싶지 않습니다.

위기의 순간,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을 의지한 그의 믿음, 그의 기도의 내용과 함께 ‘기도의 태도, 마음의 자세’를 말하고 싶습니다.

5절을 다시 보십시오. 작지만 큰 차이가 보이십니까? “회중 가운데”입니다. 솔로몬이 제단 앞에 서서 회중을 마주하여 기도했던 모습(역대하6:12)과 다릅니다. 온 백성과 함께 성전 뜰에서 기도했습니다. 같은 자리, 낮은 자리였습니다. 그렇게 ‘회중 가운데 함께 있었던 야하시엘’에게 임한 하나님의 음성을 함께 들었습니다. 왕에게 임한 음성이 아닙니다. 레위인이라는 특정 지파에 눈길이 가서도 안됩니다. 낮은 마음, 같은 마음으로 함께 엎드린 평범한 백성들 가운데 임한 하나님의 임재였습니다. ‘너희는 서있기만 하라. 내가 구원하리라.’는 구원의 약속, 함께하심의 약속이 임한 것입니다.

18절에 기록된 여호사밧과 유다 백성들의 모습을 그려봅니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의 예배의 모습이 되길 바랍니다. 몸이 아니라, 전인격이 하나님 앞에 낮아진 모습이 되길 소망합니다.

저와 여러분의 가정, 삶의 현장, 이 지역에 낮은 마음으로 함께 드리는 진정한 예배가 회복되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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