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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진Hyung Yun

11월 24일 2021년 수요일 묵상

본문: 사사기 11장 1~11절


1. 한참을 쳐다봤습니다. “머리”라는 단어에서 시선을 옮기기 어려웠습니다. 단어만 본 것이 아니라, 본문 속에 나타나는 대화를 곱씹어 읽었습니다.

한 번은 내가 ‘길르앗 방백들’ 중 한 명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또 다시는 그들의 말을 듣는 ‘입다’가 제 자신이라는 생각으로 읽었습니다. 몇 번을 반복했습니다.

‘그렇게 그 말을 할 때, 그 말을 들을 때 마음 깊이 자리 잡은 숨겨진 생각이 무엇일까…?’라며 엎드려 기도했습니다.

오늘 본문에 “머리”라는 표현이 3번 등장합니다. 10장 18절을 포함하면 이 한 단락에 ‘머리 됨’이라는 표현이 4번 등장합니다.

그렇습니다. 입다 스토리의 중심에는 ‘머리 되는 것’이 있습니다. ‘입다’가 서원을 한 이유도 ‘머리 됨, 머리로 세워주심(?)’에 대한 보답을 하려는 알량한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그가 옷을 찢은 이유(35절)는 딸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이 아닙니다. 끝까지 자기 자신 때문입니다. 머리 되는 절정의 상황에 그런 황당한(?)일이 벌어진 것을 용납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2. 창세기 2장의 인간 타락 사건 이후 범죄한 인간을 쫓아다니는 것은 ‘머리 됨’입니다. ‘머리 됨’을 위해서는 하나님을 배신하기도 하고, 이용하기도 하는 인간의 간악한 습성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래야, 참 소망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없으면 죽는다는 영적 절박함이 생깁니다.)

‘입다의 이야기’는 ‘회개(?)’마저 자기 이익으로 이용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이 잘 드러납니다. 10장 17절~11장 11절은 그들의 회개(10장 15절))이 진심이 아니었다는 것에 대한 방증(傍證, circumstantial evidence)입니다.

그들은 기다리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그들의 태도와 그들의 본심 때문에 근심하고 계시는데(16절), 그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기다리지 않습니다. 너무나 기계적입니다. ‘회개=구원’이라는 식으로 종교공식을 대입하듯 ‘10장 15절’의 말을 던지고, 자기가 알아서 합니다. 18절의 기록처럼, ‘서로 이르되’ 즉, 회의합니다. 모임 합니다.

‘누가 먼저 싸우겠느냐…?’로 난상토론이 벌어졌을 것입니다. 아무도 나서지 않으니 ‘머리가 되리라’는 미끼를 던집니다. 그래도 아무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찾아간 것이 ‘입다’였습니다. 자기들이 밥그릇 싸움 때문에, 받은 풍요를 나눠 주기 싫어서 쫓아낸 ‘입다’를 찾아간 것입니다.

진정으로 회개했다면… ‘내가 먼저 나가 싸우겠습니다.’라는 사람이 나와야 합니다. 아니, 서로 먼저 나가 싸우겠다고 난상토론이 벌어지는 것이 정상입니다. ‘머리 됨’을 걸고 누군가를 찾아 나설 것이 아니었습니다.

3. ‘머리 됨’에 대한 인간의 본성과 죄성을 우습게 보지 마십시오. 칭찬과 인정에 목마른 사람일수록 더 그렇습니다. ‘대단한 사람이라는 칭찬, 훌륭한 사람이라는 칭찬, 좋은 사람이라는 칭찬, 겸손한 사람이라는 칭찬… 등’ 뭔가 다른 듯 보이지만, 결국 죄성의 뿌리는 같습니다.

머리 되려는 인간의 본성과 자기 의로움은 ‘종교적 행위, 도덕적 선행 등’으로 얼마든지 드러나고, 포장됩니다. (좋은 종교인이라는 말을 듣는 사람이 ‘어떤 힘과 권력’을 휘두르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겸손과 도덕의 칼집에 본성의 칼을 숨기고 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사랑”을 강조한 것입니다. 여기서 “사랑”은 인간의 생각 속에 있는 ‘지고지순(至高至純)한 어떤 최상의 개념’이 아닙니다. 말 그대로 ‘지고지순(至高至純)한 십자가 대속의 은혜’를 완성하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즉, ‘내가 죽고, 내 안에 예수님께서 사시는 것’으로 말미암아 ‘고린도전서 13장’의 일이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뒤집어 말하면 ‘사랑(예수 그리스도)’없이 ‘고린도전서 13장’의 기록과 비슷한 자기 의로움에 기초한 도덕 행위, 종교행위가 가능하다는 말입니다.


4. 우리, 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읍시다. 그것 만이 자기 머리 됨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자기 의로움에서 벗어난 사람의 특징이 있습니다. 아무것도 모릅니다. 누군가 날 향해 뭔가를 했다는데, 관심 없습니다. 그 말이 나에게 어떤 자극도 주지 못합니다. 난 죽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내가 한 것도 모릅니다. 심지어, 남이 하지 않은 것도 모릅니다.

낮아지심으로, 자기를 버리심으로, 죽으심으로 ‘머리 되신 예수님’만 보여야 합니다. 그렇게 자아의 눈은 멀어버려야 합니다.

남이 보이고, 나의 의로움이 보일 때! 빨리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성령의 빛을 바라보십시오. 그렇게, 은혜의 빛에 노출되야 합니다. 그 빛이 너무 부셔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성령의 빛을 추구하는 또 다른 이유가 이것입니다. 자아의 눈을 멀게 하기 위해서 입니다!!!

내일은 ‘추수감사절’입니다. ‘뉴저지주님의교회’가 시작될 그때를 돌아보면서 감사할 것이 또 떠올랐습니다.

긴 설명보다 이렇게 한 마디로 요약해 봅니다. “머리 될 사람을 찾지 않았습니다. 함께 예배 드릴 사람을 찾았습니다.”

우리 안에 머리 되려는 나는 죽고, 진정한 사랑이신 예수님이 나 대신 사시는 은혜가 넘치길 축원합니다.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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