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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진Hyung Yun

11월 23일 2020년 월요일 묵상

본문: 역대하 18장 28~19장 3절


1. 주말 동안 ‘여호사밧 왕’에 대한 기록을 살펴보셨을 것입니다. 18장 1절의 기록처럼 그가 악한 사람의 대표자인 ‘북이스라엘의 아합 왕’과 혼인관계를 맺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입니다.

‘여호사밧 왕’은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직접 ‘아합 왕’을 찾아가서 그에게 훌륭한 접대를 받았습니다. 연합군을 경성하여 함께 ‘길르앗 라못’을 치자는 아합 왕의 제안을 승락했습니다.

‘길르앗 라못’은 전략적 요충지입니다. 북이스라엘에게도 남유다에게도 ‘길르앗 라못(오늘날, 골란고원 주변)’을 지키지 못하면 ‘길목’을 내주는 것과 같습니다. 게다가 고산지대이기 때문에 빼앗기면 탈환이 매우 힘듭니다. 당시 ‘길르앗 라못’은 ‘아람(오늘날, 시리아)’에게 빼앗긴 상태였습니다.

따라서 ‘남유다의 여호사밧’ 입장에서는 이방인들이 ‘길르앗 라못’을 차지하는 ‘최악(最惡)’보다, ‘북이스라엘’이 그곳을 차지하는 ‘차악(次惡)’을 택하려 한 것입니다.

이런 결정은 자신과 남유다의 안녕과 번영을 전적으로 하나님께 맡기지 않고, 적절한 외교적, 물리적 수단을 이용하려는 여호사밧의 ‘여호사밧의 간사함’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끝이 아니었습니다. 뭔가 찝찝했는지… 여호와께 물어보라고 합니다. 찝찝하면 안 하면 되는데, 꾸역꾸역 하려고 “먼저 여호와의 말씀이 어떠하신지 오늘 물어 보소서”라 말합니다.

생각보다 이런 식으로 신앙생활 많이 합니다. 기도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구한다는 핑계로 나의 찝찝함을 해소하기 위해 하나님의 결정을 끌어당겨오려 합니다. 정말이지, 이런 무속적 종교생활을 버려야 합니다.

2. ‘아합 왕’은 마치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거짓) 선지자 400명’을 모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승리를 약속했습니다. ‘아합’이 부르지 않은 사람, ‘미가야’ 선지자 한 사람만 빼고 다 승리를 말했습니다.

저는 ‘미가야 선지자, 아합 왕, 여호사밧 왕’에 관한 이야기를 읽을 때마다 “결국, 여호사밧은 전쟁할거면서 왜 자꾸 저럴까?”라는 생각을 합니다.

저를 비롯한 인간의 죄성, 그 깊은 곳에는 ‘듣고 싶은 말만 들으려는 본성’이 너무 강하구나라는 생각을 합니다.

사탄은 이걸 너무 잘 압니다. 그래서 오히려 기가 막히게 ‘내가 듣고 싶은 말, 내 귀에 쏙 꽂히는 말’을 해줍니다.

시드기야의 종교행위와 말을 가만히 보십시오. 눈에 보이는 화려한 철뿔을 이용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고, 여호와의 영이 임한 것처럼 신비적인 느낌을 줍니다.

참 많은 종교인들이 이런 짓들을 합니다. 신비적인 체험을 말합니다. 간증하길 좋아합니다. 사실은 신비적 체험을 가장한 자기 환상, 자기 이야기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진짜 신비적 체험을 한 사람은 말을 하지 않습니다. 아니, 말을 못합니다. 제대로 하나님 앞에, 그 분의 십자가 앞에 서면 죄인 된 내가 가장 먼저 보이기 때문입니다.


3. 여호사밧 왕은 안타깝게도 ‘무속(巫俗, Shamamism)적 차원‘에서 여호와께 물으려 한 것입니다. 만약, 그가 대속의 은혜에 기대어 여호와께 물었다면, 자신의 생각이 죄성에 오염되었다는 것을 인정하고 물었다면 ‘미가야 선지자’의 처음 말을 듣고 전쟁터로 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니, 아예 ‘아합 가문과 혼인관계’도 맺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미 그때 그런 일을 하려는 자신의 마음을 하나님 앞에 엎드려 내어드렸을 것입니다.

결국, 아합 왕도 속으로는 찝찝했는지 변장을 하고 전쟁에 참여합니다. 29절의 기록은 ‘아합의 간사함’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호사밧’에게 왕복을 입고 참전하라는 것은 자기는 살겠다는 뜻입니다. 여호사밧을 눈에 띄게 만들어 적의 집중공격을 받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런 간계에 여호사밧은 속아넘어갑니다. 아합의 간교한 부추김에 넘어간 것입니다. 과거 전쟁에서 가장 화려한 왕복(갑옷)은 ‘왕’이 입었습니다. 이 전쟁의 지휘권과 명예가 여호사밧에게 있다는 것을 은근히 부추기는 아합의 속임수에 넘어간 것입니다.

하지만, 결국 ‘아합’은 죽었습니다. 수많은 화살 가운데 하나가 그의 갑옷과 갑옷 사이 솔기를 뚫고 들어갔습니다. (이 말씀 역시 너무 신비적 혹은 운명적으로 해석하면 안 됩니다. 전쟁터는 화살이 쏟아지는 곳입니다. 가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자기 욕심 때문에 전쟁터에 나간 ‘아합의 죄성’이 더 문제입니다. 너무 길어질 것 같아 이정도에서 줄입니다.)

전쟁에서 구사일생으로 돌아온 ‘여호사밧’에게 예후 선지자가 찾아갑니다. (열왕기상 22장 29~36절을 읽어 보시면 ‘여호사밧’이 겨우 살아 돌아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분명한 메시지를 전합니다. 듣기 싫은 말을 합니다. 찔리고 아픈 말을 합니다.

신앙이 좋다는 사람들을 만나보면 참 대단한 ‘간증, 체험, 사명, 비전 등’을 듣게 됩니다. 그런데, 그 속에 ‘십자가에 못 박힘’이 없다면, 아무 소용없습니다. 우리는 항상 분별해야 합니다. ‘영적 부추김’과 ‘영적 못박힘’을 분별해야 합니다.

여호사밧의 화려한 업적, 축복, 대단한 스토리보다 그가 전 인생을 통해 붙들고 걸어간 ‘여호와 하나님께서 베푸신 대속의 은혜’를 바라보게 되길 축원합니다.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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