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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진Hyung Yun

11월 20일 2020년, 금요일 묵상

본문: 역대하 17장 1~19절


1. 역대하 17~20장은 여호사밧 왕에 대한 기록입니다. 여호사밧 왕은 남유다의 역사 속에서 ‘다윗 왕’ 만큼 유명?한 왕입니다. 특히, 북이스라엘 왕 중에서 가장 극악했던 ‘아합 왕’과 대립하였고, 동시에 대조가 되는 왕이었습니다.

‘여호사밧 왕’에 대한 평가는 2절에 잘 나타납니다. ‘다윗의 길로 행하였다.’ 속에 정말 많은 것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열왕기’의 기록도 마찬가지입니다. ‘다윗의 길’이냐, ‘여로보암(북이스라엘 초대왕)의 길’이냐로 왕들의 평가가 갈라집니다.

‘다윗의 길’로 행함으로 하나님께 인정받은 ‘여호사밧 왕’에 대한 성경의 기록을 읽으면서 우리가 점검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왜, 나는 ‘다윗의 길’로 행하고 싶은가?”입니다. 기독교를 믿는 사람,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에게 ‘다윗의 길로 행함’은 너무 당연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다시 십자가 앞으로 나아가서 물어야 합니다. 또 십자가 앞에 엎드려 내 본심을 점검해야 합니다. “내가 혹시 5절이 부러워서 그런 것이 아닌가? 여호사밧이 떨친 부귀와 영광이 목적은 아닌가?”라는 스스로의 질문 앞에 진지하게 서야 합니다.


2. 사실, 오늘 본문을 보면서 ‘여호사밧 왕’이 행한 ‘종교 개혁과 정비(6~9절)’, 그가 거느린 ‘군대의 규모와 받은 조공 등(10~19절)’의 대단함에 대한 것은 특별한 설명 없이도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다윗, 솔로몬 왕 이후 이렇게 강성한 남유다를 만든 왕이 없었다. 하나님께 돌아오니 축복을 주셨다.’라는 사실은 조금만 생각해 봐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멈출 수 없습니다. 한걸음이라도 더 나가야 합니다. 말씀이 나의 심령을 비추는 은혜까지 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3절을 다시 보십시오. 그 중에서도 “다윗의 처음 길”입니다. 그냥 ‘다윗의 길’이 아닙니다. “처음 길”입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왜 성경은 ‘다윗의 길’이 아니라, “다윗의 처음 길”이라고 말합니까? 혹시, ‘다윗의 처음 모습’이 기억나십니까? 다윗은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평범, 아니 평범 이하의 소년이었습니다. 아버지조차 그가 왕이 될 것이라고 상상도 하지 않았습니다. 사무엘이 기름을 부으러 왔을 때, 양 치고 있었습니다. (사무엘상 16장)

그렇게 그가 다시 등장한 것은 너무 잘 아시는 ‘블레셋과의 전쟁’이었습니다. 다윗은 정식으로 참전한 것이 아닙니다. 형들 도시락 심부름하다가 속된 말로 얼떨결에 골리앗과 싸웠습니다. 무슨 의도를 가지고, 비전을 가지고, 목표를 가지고 그 자리에 간 것이 아닙니다.

‘처음 다윗’은 말 그대로 순수했습니다. 골리앗을 무찌르겠다는 비전, 왕이 되려는 목표, ‘사울은 천천, 다윗은 만만’이라는 칭송을 들으려는 생각도 없었습니다.

네, 다윗은 양 치기 외에는 아무 관심 없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양 치는 오늘, 지금,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순전히 사랑한 사람이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을 이용해서 자아실현 하려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대선지자 사무엘의 기름부음 마저 그의 순수함에 녹아서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과 동행할 수만 있다면 왕보다 양치기가 더 좋았던 사람입니다.

‘역대하’ 및 모든 성경을 볼 때, 우상숭배의 정확한 의미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3절 하반절의 “바알들에게 구하지 아니하고…”를 읽으면서 ‘표면적 우상숭배 행위’에 국한시켜서는 안 됩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우상숭배’는 ‘이방 종교 혹은 종교 신상, 보이는 물질 등’을 따라간 수준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이방 신들(육체로 누리는 모든 것들)을 함께 섬긴 것을 말합니다.

이유는 한가지입니다. ‘자신에게 유리한 신’을 ‘자신이 원하는 방법’으로 이용하려는 인간의 죄성 때문입니다.

사탄은 이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아실현’을 위한 종교생활을 하도록 내버려둡니다. 더 무서운 사실은 예수님을 우상처럼 섬기도록 부추깁니다. 그렇게 자아를 위한 종교생활에 취하도록 내버려 둡니다.

“다윗의 길”보다 “다윗의 처음 길”을 따라가야 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다윗의 순수한 동기를 따라가야 합니다. 순수한 신앙의 동기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는 ‘죽어서 천국 입성’을 구원으로 알고 있는 우리의 잘못된 구원관도 버려야 합니다.


3. 또한 6절의 “그(여호사밧)가 전심으로 여호와의 길을 걸어…”라는 말은 ‘여호사밧의 종교적 열심’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전심’으로 번역된 히브리어‘레브(leb)’는 ‘중심’으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속사람의 본심입니다. 그리고 ‘속사람의 본심’은 ‘영혼 깊은 곳에서 시작되는 모든 것의 동기(motivation)’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진정한 능력은 ‘순수한 영적 동기’에서 시작됩니다. 간혹(사실은 흔히) 10절의 “두려움을 주사”라를 ‘신이 주는 공포심’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3절의 “두려움을 주사”는 ‘여호와께서 대속의 은혜를 붙든 여호사밧과 함께 하심으로! 동행하심으로! 일어나는 영적 현상입니다.

제발, ‘믿는 사람들 건드리면, 여호와의 두려움이 임하여 벌벌 떨게 한다.’라는 식의 ‘종교적 유아성(幼兒性/childish)’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여전히 이런 말씀을 대하면서, ‘여호사밧’이 솔로몬의 영광, 다윗의 영광을 회복했고, 그가 누린 축복을 다시 받았다’는 식으로 해석하면 참 속상한 일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것입니다.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본심을 발견하려면, 십자가에서 내 패역한 본성이 죽어야 합니다. 그렇게 회복하지도 못할 인간의 순수함이 아니라, 십자가를 향한 예수님의 순수한 중심과 동기가 나를 이끌어가게 되길 축원합니다.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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