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요한복음 6장 16~29절
1. 오늘 본문 16~21절은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으신 사건’의 기록입니다. 기적입니다. 그러나, 기적은 표지판(표적)일 뿐입니다. 이 사건은 ‘마태복음 14장 22~33, 마가복음 6장 45~52절’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 14장 22절 이하에 기록을 보면서 예수님과 함께 ‘물 위를 걷는 기적(?)의 삶’을 경험하고 싶어합니다. 그런 것이 나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과 함께 그런 놀라운 일을 우리 삶에서 체험합니다.
하지만, ‘오병이어’, ‘물위를 걸으신 사건’을 통해 말씀하고 싶으신 것은 이것입니다.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에게 세상의 풍랑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입니다.
마가복음 6장 52절 “이는 그들이 그 떡 떼시던 일을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그 마음이 둔하여졌음이러라”라고 ‘물 위를 걷는 사건’의 결론을 이야기합니다.
‘요한복음 6장’ 전체의 흐름, 그 마지막은 십자가에서 대속의 은혜를 완성하심으로 참 생명의 떡이 되시는 것(53~58절)입니다.
2. 끝까지 천천히 읽어보면 보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느껴집니다. 예수님이 정말 하고 싶어하신 말씀이 들립니다. 22~26절을 보면 ‘끝까지 따라간 사람들’이 무엇을 들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자신들이 생각하는 임금으로 추대하려던 사람들은 떠났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런 자들을 피해 산으로 가시자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그래도 끝까지 예수님을 찾으려 했던 사람들은 들었습니다. ‘오병이어 사건’의 참의미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들었습니다! (계속 읽어 가시면, 뒤에 반전도 있습니다.)
첫 시작은 책망에 가까운 것처럼 보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따라간 진짜 이유를 말씀하십니다. 26절을 읽으며 ‘난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만약, 그렇다고 말하면 그것이 거짓말입니다.
모두가 첫 시작은 그렇게 합니다. 표적이 가리키는 예수님이 아니라, 표적(기적)에 마음이 빼앗깁니다.
그러나, 결국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로 하나씩 하나씩 깨닫게 됩니다. 한 꺼풀씩 자아의 껍질을 벗게 됩니다.
3. 교회를 다니고,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하면서 가장 안타까운 삶이 ‘거기서 멈춘 삶’입니다. 표적(sign)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표적 아래에서 다 이룬 것처럼 사는 삶입니다.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표지판(sign)’ 아래에도 그늘이 있습니다. 뙤약볕을 가려주는 조그만 그늘이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표지판’ 따위와 비교할 수 없는 ‘영혼의 그늘, 영혼의 안식처, 영혼의 진정한 양식, 생명의 떡’이십니다.
‘표지판’이 주는 일시적 즐거움과 평안, 풍요에 속아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님께 나아가지 못하는 것처럼 비극이 없습니다.
우리 평생에, 끝까지, 숨질 때까지 멈추지 말야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날 위해 행하신 그 아름다운 일의 가치를 더욱 알아가는 것입니다.
4. 그렇다고 27절을 곡해하면 안 됩니다. “썩을 양식을 위해 일하지 말라”는 것은 이 땅의 생업을 포기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행한 유대교의 종교행위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틀렸다는 것이 아닙니다. ‘모세의 율법’ 조차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가리키는 ‘표지판’이라는 의미입니다.
광야에서 ‘만나’를 먹은 것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만나’도 ‘생명의 떡’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것이었음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말씀을 읽으며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수님을 끝까지 쫓아가서 들은 첫 마디가 칭찬은 아니었습니다. 어쩌면 찔리는 말, 속이 들켜버린 이야기었습니다. 그런데, 그게 시작이었습니다.
오늘도 기도하게 됩니다. 말씀 앞에서 감추고, 가려 놓은 속마음이 다 드러나도록 더 기도하게 됩니다. 그 드러난 마음에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 채워지길 기도할 뿐입니다.
어리석은 저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고, 선하게 인도하시는 예수님의 사랑에 더욱 기대는 하루 되길 기도합니다.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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