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역대하 16장 1~14절
1. 오늘 본문은 참 안타까운 내용입니다. 하나님을 평생토록 의지하며, 하나님이 베푸신 대속의 은혜를 붙들고, 그 언약을 지키며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아사 왕’을 통해 다시 한번 깨닫게 됩니다.
16장에 나타난 ‘아사 왕’의 모습은 14~15장과 같은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입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역대기 기록자(에스라)를 감동하실 때 ‘아사 왕’의 일생을 대조하여 기록하게 하심으로 읽는 모든 성도들에게 교훈과 메시지를 주고 계십니다. 처음과 나중이 동일하기 위해서는 지금이 정말 중요함을 다시 깨닫게 됩니다. 그 어떤 신앙의 연륜, 업적(?), 간증 보다 중요한 것은 ‘지금 내가 회개하고 돌이키고, 십자가 은혜 붙들고 있느냐’ 입니다.
1~6절은 ‘아사 왕’과 아람(오늘날 이스라엘 북쪽에 위치한 ‘시리아’)의 ‘벤하닷 왕’과 조약을 맺는 기록입니다. 7~10절은 이런 ‘아사 왕’을 책망하는 ‘선견자(선지자) 하나니’와 이것을 거부하는 아사의 불순종입니다. 11~14절은 ‘아사 왕’의 죽음입니다.
2. ‘구스’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뒤 ‘남 유다’에는 오랫동안 평화가 지속됩니다. (15:19) 그런데, ‘아사 왕’이 죽기 2년 전에 ‘북이스라엘’의 ‘바아사 왕’이 남유다를 침공하여, 예루살렘 북쪽 약 5km(3 mile) 정도에 위치한 ‘라마’를 빼앗고, 요새화 합니다. 전초기지화 한 것입니다. 이유는 종교적 이유로 ‘예루살렘 성전’을 찾는 사람들을 차단하기 위해서 입니다. 북한이 탈북자를 막으려는 것과 거의 비슷한 이유입니다. (1절)
남유다의 수도, 예루살렘이 위협받는 상황에서 ‘아사 왕’이 취한 행동은 이전(14~15장)에 보여준 것과 완전히 다릅니다. 북이스라엘과 북쪽으로 국경을 맞대고 있는 ‘아람 왕, 벤하닷’에게 은금(일종의 조공)을 주고 ‘아람’이 ‘북이스라엘’과 맺은 화친 조약을 깨고 공격하게 만듭니다.
결국, 후방이 공격당한 ‘바아사’는 군대를 돌려 북이스라엘로 돌아갔습니다. ‘아사 왕’은 ‘바아사’가 라마를 건축하려던 자재를 가지고 ‘게바’와 ‘미스바’를 요새화 합니다. 북이스라엘로 약 10km(6mile) 정도 국경을 더 밀어 올린 것입니다.
2. 언 듯 보면 ‘아사 왕’은 직접 전쟁을 피한 참 지혜로운 선택을 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하나니’를 보내 그를 책망하십니다.
7절 “아람 왕의 군대가 왕의 손에서 벗어났나이다”라는 말은 하나님의 안타까움입니다. 8절의 기록처럼 그 옛날 ‘구스의 침공(14장)’ 때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여 싸운 것처럼 싸웠으면 ‘아람’에게 승리했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성전과 왕궁’의 창고를 탈탈 털어 ‘아람 왕, 벤하닷’에게 조공을 바침으로 ‘남유다’는 사실상 ‘아람’의 지배하에 놓이게 된 것입니다.
9절 하반절에 “이 후부터는 왕에게 전쟁이 있으리이다”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주변 민족, 나라들을 부추겨서 전쟁을 일으키신다는 말이 아닙니다.
전쟁이 그치지 않는 이유는 ‘남 유다, 아사 왕’ 스스로 굴종적인 모습, 비굴한 모습을 보였기 때문입니다. 과거 ‘여호와 하나님’만을 의지하여 ‘구스’를 물리친 모습이 아니라, ‘아람 왕’에게 조공을 바치며 비굴한 승리 혹은 평화를 구걸한 모습을 스스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나 스스로 ‘여호와 하나님’이 아니라, 다른 것들을 의지하는 모습을 보이면 공격당합니다. 더 안타까운 것은 말로는 “하나님만을 의지합니다.”라고 하지만, 실상은 ‘하나님이 주시는 보이는 것, 누릴 수 있는 것 등’을 교묘히 의지하는 우리의 모습을 주변 사람들은 다 알고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이 주신 것, 축복받은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도 알고 보면 ‘아사 왕’이 뒤로 조공을 바친 것과 똑같습니다. 그냥 자기가 이런 저런 방법으로 긁어 모으고, 그 자리에 올라가려고 갖은 권모술수를 쓴 것이 뿐인 경우가 허다합니다.
3. ‘선지자, 하나니’의 말을 들은 ‘아사 왕’은 회개는 커녕 화를 냅니다. 백성 중에 몇 사람을 학대했다는 말을 심하게는 ‘처형했다’입니다.
그 옛날 ‘다윗’과 정반대의 모습입니다. 자신의 죄를 책망하는 ‘선지자, 나단’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인 ‘다윗’과도 정반대이며, 과거 하나님만을 의지하던 ‘아사 왕’의 모습이 아닙니다.
이것이 인간의 한계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축복’ 조차도 두려움과 떨림 없이 당연한 듯 오랜 시간이 지나면 결국 이렇게 됩니다. “이렇게 충성을 다한 내가 이정도도 못 누려?”라는 당연함이 들면 이렇게 됩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당연함을 취하기 위해 남과 나를 비교하여 ‘우월감’을 가집니다. 기독교 종교인들은 ‘선택 받음’이라는 더 고차원적인 ‘우월감’을 붙잡습니다. 그렇게 내가 누리는 것들을 당연하게 여기며, 서서히 ‘감사함, 겸손함’이 사라져 갑니다.
저와 여러분은 ‘내가 누릴 수 있는 것들’에 대해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을까요? 십자가 앞에 항상 묻고, 떨리는 마음으로 ‘누리는 것들’을 대하는 사람은 ‘우월함, 당연함’에 사로 잡히지 않을 것입니다.
9절 상반절의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 마음에 들면 능력을 베풀어 잘 되게 해준다. 성공시켜준다.’는 말이 아닙니다.
‘사람이 어떤 위치에 있건, 무엇을 얼마나 가지고 있건 상관없이 죄인됨을 인정하고 여호와 하나님이 베푸신 대속의 은혜’ 붙드는 사람에게 만나주시고, 동행하신다’는 약속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육신의 생명이 다하는 그 순간까지 9절 상반절을 붙들었어야 합니다. 전쟁이 있어도 끝까지 붙들었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말씀을 통해 우리를 부르십니다.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들을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겠노라”고 말씀하십니다.
지금, 오늘, 십자가를 통해 여호와 하나님을 만날 때입니다. 가까이 계시며 우리를 부르시는 그 음성에 믿음으로 반응하시길 축원합니다.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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