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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진Hyung Yun

11월 18일 2020년 수요일 묵상

본문: 역대하 15장 1~19절


1.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아사랴’를 통해 ‘구스’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온 ‘아사 왕’에게 메시지를 전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찾는 자에게 평안을 주실 것을 ‘아사 왕’과 백성들에게 약속하십니다. 14장 11절의 간구에 대한 확증입니다. 달리 표현하면 “너의 간절한 부르짖음에 내가 응답하였다.”라고 확인시켜주신 것입니다.

2~7절에 기록된 하나님의 메시지를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만남, 동행’입니다. “너희는 나를 떠났지만, 나는 너희와 함께 하고 싶다. 너희를 다시 만나고 싶다.” 입니다.

하나님께서 범죄한 인간을 떠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정결과 거룩이 본성이며, 속성이신 하나님은 죄와 함께하실 수 없습니다. 죄악과 구별되어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죄로 오염된 인간을 자발적, 적극적으로 떠나신 것이 아니라, 떠나실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2. 하나님께서는 다시 하나님을 간절히 찾은 ‘아사 왕’을 격려하고 계셨습니다. ‘아사 왕’은 하나님의 격려와 사랑, 능력을 힘입고 ‘이방종교, 우상숭배’와의 싸움을 이어 나갑니다. ‘구스’를 물리친 것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전쟁에서 승리하고, 전리품을 가져왔다고 축복받은 것처럼 착각하지 않습니다. 우쭐대지 않았습니다.

정말 싸워 이겨야 할 것, 이스라엘(남유다, 북이스라엘 포함)이 쇠퇴한 근본 원인과 싸웁니다. 이것에서 승리하지 못하면 언제든 여호와 하나님의 임재가 거둬질 수밖에 없는 ‘유다 백성 깊숙이 가려진 죄악, 자기 안에 숨은 죄성’과 싸웁니다.

본문 3절과 8절을 보십시오. 남유다와 북이스라엘에 만연한 우상숭배의 심각성을 알 수 있습니다. 북이스라엘에 비해 남유다는 덜했다고 절대 말할 수 없습니다.

8절의 “여호와의 낭실 앞에 있는 여호와의 제단”은 솔로몬 성전 안에 있었던 제단을 의미합니다. 그것을 재건했다는 기록이 가히 충격입니다. 솔로몬 사후 겨우 3대(르호보암, 아비야, 아사)가 지났을 뿐입니다.

아마도, 르호보암 시대에 애굽 왕 시삭의 침공으로 파괴됐을 것을 추정합니다. 그런데 누구도 이 무너진 제단을 재건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무너진 예배, 왜곡된 예배, 오염된 예배, 뒤틀어진 예배, 사람 방법이 섞인 예배’가 회복된다는 것이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닙니다.

‘여호와의 제단’이라는 종교적 장소의 재건(8절)과 엄청난 양의 제물(11절)을 드린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결국, 중심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영적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다시 ‘대속의 은혜를 통해 구원을 베푸시는 그 언약’을 붙들어야 합니다. 12절의 사건이 있어야 합니다. “마음과 목숨을 다하여 여호와를 찾기로, 죄인에게 베푸신 속죄의 은혜, 그 약속을 붙들고 엎드려야 합니다.”


3. 그럼 여기서 이런 질문을 해야 합니다. “중심의 회복, 영적 결단, 대속의 언약을 붙들고 돌이켰는지 아닌지 어떻게 아느냐?”라는 질문 말입니다. (남이 아닙니다. ‘내가 붙들었는지 아닌지, 돌이켰는지 아닌지’가 중요합니다.)

그 답은 16절에 있습니다. 아사 왕은 자신과 자기 가정부터 회개하고 돌이켰습니다. 그의 어머니 ‘마아가’가 섬기는 ‘아세라 목상’을 빻아서 ‘기드론 시냇가’에서 불살라 버리고, 선왕의 왕비 자격까지 박탈해버립니다.

여기서 16, 17절을 주의해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16절의 “불살랐으니”는 ‘불살랐다’로 번역해야 합니다. 16절과 17절은 다른 문장입니다.

그러니까, “‘아사 왕’이 자기 가정의 우상문제는 해결했지만, 우상을 섬기는 산당은 남겨두었다.”고 단순히 생각할 수 없습니다.

17절을 원어적 의미를 부각해서 해석하면 이렇습니다. “그 산당은 돌이키지 못했다(제거되지 않았다) 이스라엘로부터”입니다.

16~17절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산당(bamah)이 어떤 곳인지 알아야 합니다. 번역상으로는 ‘높은 곳(high place)’입니다. 그러나 ‘산당’은 단순히 높은 장소만이 아닙니다. 일반적으로 다른 곳보다 높은 위치에서 우상을 만들어 종교행위를 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산당’은 평지, 길거리, 성문 앞 광장에도 있었습니다. 더 심각한 것은 이미 이스라엘 각 가정에 이런 ‘산당’ 즉, 우상을 놓아둔 특정 장소가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습니다. ‘아사 왕’을 비롯한 남유다의 ‘개혁 왕’들이 ‘산당’을 제거하지 않은 것도 있겠지만, 제거할 수 없었다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 백성들 사이에 이미, 너무 깊숙이 침투해 버렸기 때문입니다.


4. 그래도 우리는 포기할 수 없습니다. 17절 후반절은 “아사의 마음이 일평생 온전하였더라”라고 기록합니다. 완벽한 종교적 행위와 성품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지막에는 안타까운 모습을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과거나 미래가 아니라, 지금 그가 ‘대속의 은혜’를 붙들고 있는 것을 보고 계십니다.

‘아사 왕’은 오늘! 내 속에 숨은 우상(자아와 자아가 기대고 있는 것들)을 버리고, 그에 합당한 행동과 결단을 했습니다. 아프고, 고통스럽고, 심지어 수치스럽지만 잘라냈습니다.

‘아사 왕’의 결단과 행동을 생각해보십시오. 왕이 자신의 가정에 숨겨둔 ‘우상’을 꺼내어 불태우고, 어머니를 폐위했습니다. 이 결단과 행동은 온 유다외 이스라엘에 퍼졌을 것입니다.

다시 9절을 봅시다. ‘에브라임, 므낫세, 시므온 가운데에서 나온 사람들’은 북이스라엘의 종교적 타락을 피해 목숨을 걸고 피난 온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남유다’의 종교적 타락을 보면서 여전히 갈등하고 힘들어 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아사 왕’의 개혁, 결단을 보면서 돌아옵니다. ‘아사에게 돌아왔다’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께로 돌아왔다는 것입니다.

자세히 말씀드리지 않아도 아실 것입니다. ‘누군가를 예수님께로, 교회로 돌아오게 하고 싶다면…’ 방법은 하나뿐입니다.

“내가 그것을 버리고, 잘라내고, 도려내고 여호와께로 돌아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나의 악함이 아닌, 십자가의 능력과 선하심에 이끌려 하나님께 돌아가는 방법 외에는 없습니다.”

매일, 매순간 십자가 앞에서 회개함으로 여호와 하나님께 돌아가는 우리의 삶을 통해 그들이 예수님께 돌아오게 되길 축원합니다.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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