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역대하 13장 1~14장 1절
1. 역대하 13장은 ‘르호보암’의 아들 ‘아비야’에 대한 기록입니다. 유명한(?) 남유다의 왕이 아닙니다. 왕이라는 그의 직위보다 그가 따라간 ‘믿음의 가치’가 무엇이었는지가 더 중요합니다.
주말에 살펴보셨던 것처럼 ‘르호보암’ 재위 5년에 애굽왕 시삭의 침공을 받았습니다. 예루살렘 성전과 궁궐은 약탈당합니다. 그 유명한 ‘금 방패’를 모두 빼앗깁니다. 다행이라고 말하기 뭐하지만, 완전히 멸망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스스로 겸비’ 즉, 회개하는 모습이 보였기 때문입니다.
‘르호보암’의 회개에 관하여 뭐라고 해야 할까요? ‘완전한 회개’가 아니었다고 해야 할까요? 그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말미암은 회개에 완전, 불완전은 없습니다.
결국, 단회적 회개에 멈췄다고 봐야 합니다. 매일 매순간 모든 사건에 대하여 하나님께 점검 받고, 하나님 앞에서 돌이켜야 합니다. ‘르호보암’은 회개의 연속성을 잊은 것입니다.
물론, 회개는 생각에서 멈추는 것이 아닙니다. 행동으로 연결되는 것입니다. 생각혹은 감정에서 멈추는 것은 ‘후회’이지 성경이 말하는 ‘회개’가 아닙니다. 다섯 걸음을 다른 길로 갔다면, 한 걸음이라도 방향을 바꿔서 돌이키는 것이 ‘회개’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연속적으로 일어날 때 비로소 우리는 그 삶의 습관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제가 ‘르호보암’이 단회성 회개에서 머물렀다고 말씀드릴 수 있는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놋 방패’때문입니다. ‘금 방패’를 빼앗겼다고, ‘놋 방패’를 만든 것은 정말 어리석은 짓입니다. ‘금이냐, 놋이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방패입니다. 르호보암과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눈에 보이는 ‘방패’가 아닙니다. ‘놋 방패’를 만든 ‘르호보암’은 금이라는’ 최고의 축복’이 사라지니, 다소 열등한 놋이라는 ‘차선의 축복’에 기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어리석음입니다.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것들이 ‘자신이 축복된 삶’을 살고 있다는 증거라고 생각합니다. 최고가 안되면 그 다음 것이라도 붙잡고, 누리려고 안달합니다.
이렇게 표현하면 어떨까요? ‘보이는 것을 주시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고 있는 사람들이 정말 많습니다. 거의 대부분입니다.
이런 자신을 인정하고, 십자가 앞에서 회개의 삶을 포기하면 안 됩니다. 십자가를 통한 완전한 회개와 구원, 그리고 그 연속성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2. 오늘 본문의 ‘아비야’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아비야’가 아주 잘해서 그에게 승리를 주신 것이 아닙니다.
그가 붙든 ‘소금언약’ 때문입니다. 레위기 2장과 민수기 18장, 그리고 오늘 본문에 등장합니다. 상세히 다 말씀 드릴 수 없으나, 이것만 기억하시면 됩니다. ‘언약의 불변성’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죄인인 인간을 위해 베풀어 주신 ‘대속의 제사’를 통한 속죄의 약속이 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군사의 수와 규모에 있어서 매우 불리한 전쟁(3절)을 치르는 아비야는 ‘놋 방패’를 들고 나가지 않았습니다. ‘소금언약’을 붙들고 나갔습니다.
4~12절에 그가 모든 이스라엘 족속을 향하여 내뱉는 말은 회개를 촉구하는 부흥사가 생각날 정도입니다. 아마, 절규에 가까웠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아 너희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와 싸우지 말라!(12절)”라고 외치는 그의 마음 속에는 “제발, 돌아와라! 여로보암의 금송아지를 버리고, 대속의 은혜를 붙들고 회개하는 자들을 긍휼히 여기시는 여호와께로 돌아오라!”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여로보암’은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처음 하나님께서 그에게 북이스라엘의 건국을 허락하시며, ‘나의 규례, 나의 언약을 붙들어라’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의 당부를, 다시 부르시는 그 음성을 걷어차 버렸습니다. 군사들을 매복시켜 아비야와 남유다의 군대를 공격합니다.
그러나, ‘아비야’는 포기하지 않습니다. 당황하지 않습니다. “여호와께 부르짖고, 제사장들은 나팔을 붑니다.”(14절) 그 옛날 아이성 전투(여호수아 8장)가 생각납니다.
여로보암은 이 전쟁에서 패한 뒤 죽음을 맞이합니다. 북이스라엘은 급격한 쇠퇴의 길을 걷게 됩니다.
3. 우리는 이 말씀을 보면서 ‘아비야’라는 인물보다 ‘여호와 하나님의 언약’을 다시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도 ‘회개하여 돌이키는 자’에게 임하는 ‘십자가 언약’의 능력을 붙들어야 합니다.
우리가 자칫 착각하기 쉬운 것이 있습니다. ‘시내산 언약’, ‘소금언약’, ‘다윗언약’ 등은 ‘이스라엘 민족 혹은 유다의 후손, 다윗의 집안’이라는 혈통적 가문에 대한 언약이 아닙니다. 무슨 짓을 해도 그 집안의 왕위를 이어준다는 약속이 아닙니다. ‘너희가 어떠함에도 불구하고 나는 대속의 은혜를 베풀어 너희를 구원할 것이다’라는 약속입니다.
그렇게 ‘여호와 하나님께서 베푼 대속의 은혜를 붙드는 자, 그 은혜를 믿고 회개하고 돌이키는 자’에게 허락된 약속입니다. 대속의 은혜의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실 것에 대한 약속입니다.
“너희는 파기하였지만, 나는 지킨다. 나는 계속 새로운 언약을 갱신한다.”는 여호와 하나님의 신실하심, 긍휼히 여기심이 ‘언약’의 중심에 흐르고 있습니다.
계속해서 언약을 파기한 인간 악함과 계속해서 언약을 지키시고, 갱신하시는 하나님의 성품을 안다면 ‘축복으로 왕이 되건, 부자가 되건’ 그런 것 따위에 마음을 빼앗겨 우쭐거릴 수 없습니다.
십자가 언약, 그 은혜 마저도 인간의 우쭐댐으로 이용할 수 있는 것이 범죄한 나 자신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을 알면 가만히 있을 수 없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이 내가 사는 유일한 방법임을 알고 달려갑니다. 매일, 매순간 모든 상황에서 십자가에 붙들림을 택하게 될 줄 믿습니다.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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