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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진Hyung Yun

11월 13일 2020년 금요일 묵상

최종 수정일: 2020년 11월 15일

본문: 역대하 10장 1~19절


1. 솔로몬이 죽은 뒤 이스라엘은 남과 북 두 나라로 분열됩니다. 일반적으로 북이스라엘은 매우 부정적으로 생각합니다. 여로보암의 반역에 의해 생긴 국가이며, 종교적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에서 멀어진 열등한 국가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역대하 10장을 차분이 읽어보시면 지금까지 북이스라엘에 대하여 가졌던 생각이 말 그대로 고정관념이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새로운 시각에서 이스라엘 역사가 보이게 됩니다.

이스라엘 분열의 원인을 제공한 것은 ‘르호보암’입니다. 거슬러 올라가면 분열의 근본적 원인은 ‘솔로몬’에게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궁극적으로는 이스라엘 역사 전반에 흐르는 주요 지파의 주도권 다툼입니다.

간략히 말씀드리면, 애굽에서는 ‘요셉 지파(에브라임, 므낫세)입니다. 출애굽 당시는 레위 지파(모세, 아론)로 볼 수 있습니다. 가나안 정복 초기는 ‘에브라임 지파(여호수아)’입니다. 사사기 시대의 혼란을 지나, 초대 왕은 ‘베냐민 지파(사울)’에서 나왔지만, 결국 ‘통일왕국’을 이룬 것은 ‘유다지파(다윗, 솔로몬)’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지파들 간의 종교, 정치 주도권 다툼의 연속이었습니다.

성경의 인물들에 대한 신격화를 배제해야 하는 것처럼 ‘이스라엘의 역사’를 거룩하고, 성스러운 역사로 숭배해서는 안 됩니다.

‘이스라엘 역사’ 속에도 힘과 권력, 부와 명예를 차지하여 ‘자아실현’하려는 인간의 죄성이 드러나 있습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계획, ‘범죄한 인간을 구속(救贖, Redemption)하시는 하나님의 역사’가 이스라엘이라는 민족, 국가를 통해 드러난 것 뿐입니다.


2. 오늘 본문에 드러난 ‘솔로몬’이 죽은 뒤 왕이 된 ‘르호보암’의 태도는 그리 놀라운 것도 아닙니다.

6~7절의 기록처럼 솔로몬과 함께 했던 원로들이 왜, 백성들을 후대하여 기쁘게 하고, 선한 말을 하라고 했을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원로들이 생각해도 아버지 ‘솔로몬’이 각종 건축과 토목공사를 위해 백성들에게 부과한 세금과 노역이 과도했다는 것을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것을 ‘르호보암’이 몰랐을까요? 그도 분명 알았을 것입니다. 아버지가 부과한 노역과, 세금이 과도했음을 알지만, 자기가 듣고 싶은 말만 듣고 싶었던 것입니다.

5절을 보면 조금 갈등은 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결국 자기가 듣고 싶은 말만 듣고 싶어 ‘자기와 함께 자라는 젊은 신하들’을 찾아가서 의논합니다. 이에 그들이 들려준 말은 “내 새끼 손가락이 내 아버지의 허리보다 굵으니…(10~11절)”였습니다. 한마디로 ‘네가 제일 잘 났어.’라는 부추기는 것입니다.

이런 말을 듣고 누가, ‘르호보암’을 따르겠습니까? 특히, ‘여로보암’이 따를 수 있었을까요? 사실 ‘여로보암’은 ‘밀로성’을 건축하는 감독관이었습니다. 열왕기상 11장 26~40절을 꼭 읽어봐야 합니다. 그 기록에 따르면 하나님께서는 이미 솔로몬의 악함을 보시고, ‘선지자 아히야’를 통해 ‘여로보암’이 북이스라엘을 세우게 될 것을 말씀하십니다. 이 사실을 들은 ‘솔로몬’은 ‘여로보암’을 죽이려 했고, 그는 애굽으로 도망을 갑니다. 그렇게 솔로몬이 죽자 다시 돌아온 것입니다.

4절에 기록된 ‘여로보암’의 말은 ‘간절한 요청’이었을 것입니다. 조건의 제시가 아니라, “제발, 아버지처럼 더 이상 백성들을 힘들게 하시 마십시오.”라는 간청이었습니다.

이 간청을 ‘르호보암’은 거절했습니다. 그것도 너무 교만한 태도로 거절합니다. ‘네가 제일 잘 났다.’라는 주변 사람들의 말에 진짜 자기가 잘 난 줄 착각한 것입니다.

3. ‘르호보암’ 즉위할 때 나이를 생각해보면 대략 30대 후반에서 40세 전후 였습니다. 그렇다면 그가 인격이 형성될 시기에 보고, 누리고, 경험한 것들이 무엇입니까? 네, 아버지 솔로몬의 부와 명성입니다. 르호보암 자신이 거칠고, 아프고, 힘들어도 직접 걸어간 길이 아니었습니다. 아버지의 등에 업혀서 걸어간 풍요의 삶이었습니다.

솔로몬은 르호보암에게 ‘대속의 은혜’만을 붙들고 두려움과 떨림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르호보암’에게 보여주었어야 했습니다. 금방패로 대변되는 보이는 것들을 물려줄 것이 아니었습니다.

정말 자신이 받아 누린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믿음이 있었다면, 할 수 있는 대로 아들 ‘르호보암’이 자신이 누린 부와 명예에 기대거나, 치우치지 않도록 각별한 주의를 했어야 합니다. 왕세자라는 칭찬에 들뜨지 않도록 했어야 합니다. 인생의 시기 마다 감당해야 할 아픔, 고통, 괴로움, 힘듦을 남들과 같이 겪을 수 있도록 마음이 아파도 지켜봤어야 합니다.

이런 생각을 헤봅니다. “내가 가장 도움을 주고 싶은 사람일수록 ‘고민, 기다림, 절제함’이 동반된 도움을 줘야 한다.”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은 범죄타락한 인간을 그 누구보다 구원하고 싶으셨습니다. 돕고 싶으셨습니다. 그래서 더 기다리셨습니다. 성경의 역사, 이스라엘의 전 역사, 인류의 역사를 통해 기다리셨습니다.

인간이 넘어지고, 쓰러지고, 어려움을 겪으며 자신의 본질을 깨닫기를 기다리셨습니다. 아파도 묵묵히 참으셨습니다.

구약과 신약을 통한 ‘예수님의 오심’은 ‘참으심과 기다림’의 연속이었습니다. 그 오랜 기다림, 절제, 고민이 십자가로 드러났을 때! 사람들은 마침내 영원한 용서, 치유, 회복, 생명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가장 좋은 것은 ‘덮어놓고 해결해 주심’이 아닙니다. 십자가 붙들고 함께 넘어가 주시는 ‘극복의 은혜’입니다.

예수님과 내 앞에 놓인 모든 어려움을 딛고 넘어서게 되길, 참된 주님의 도우시는 손길을 경험하게 되길 축원합니다.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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