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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진Hyung Yun

11월 10일 2020년 화요일 묵상

본문: 역대하 8장 1~18절


1. 오늘 본문(대하8:1~16)은 ‘솔로몬 성전 건축’에 관한 기록의 마무리이며, 추가적인 내용입니다. 특히, 1~6절을 가만히 생각해보면 ‘솔로몬’은 왕으로 재위하는 기간의 거의 대부분을 ‘건축 및 토목’관련 공사를 했습니다.

‘성전과 자신이 거처할 궁궐’을 짓는데 ‘20년(성전 7년+궁궐 13년)’이 걸렸습니다. 그리고 이후에도 ‘국고성, 병거성, 마병의 성 등’을 건축(4~6절)합니다.

건축을 통해 이스라엘의 국가 경제가 활발해졌을 것입니다. 국경 수비와 국방력이 강화됐을 것입니다. 좋은 일입니다. 한 국가가 번영하고 강성해지려면 필요한 것들입니다.

그러나, 조금 상세히 본문을 볼 필요가 있습니다. 작은 단서들을 조각모음 할 필요가 있습니다. ‘솔로몬의 업적’이라는 선입견을 뒤로하고 읽어야 합니다. ‘역대기’라는 이스라엘의 역사 기록을 있는 사실 그대로를 봐야 합니다. 성전이라는 위대한 건축물을 지은 ‘택함 받은 솔로몬’이라는 우상화에 빠지기 쉬운 마음을 버리고 봐야 합니다.


2. 몇 차례 말씀 드렸지만, 그렇게 필요하지 않는 과한 것들이 없었다면, ‘금 도금, 거대한 기둥, 화려한 장식(12마리 소)’같은 것이 없었다면, 궁궐을 너무 과하게 짓지 않았다면 20년이라는 세월이 필요했을까요? 20년의 건축 사업도 모자라 계속된 ‘국고성, 병거성 등’의 건축이 어떤 결과를 가져왔을까요? 그의 재위 기간 40년 동안 대규모 건축과 토목 공사가 끊이지 않은 것은 아닐까요?

결국 이런 과도한 건축으로 인한 불만은 ‘남북 이스라엘’로 갈라지는 계기를 제공합니다. 몇일 뒤 읽으시겠지만 ‘역대하 10장’을 보면 ‘솔로몬의 아들’인 ‘르호보암(남유다의 초대 왕)’은 과도한 건축을 멈춰 달라는 ‘여로보암(북이스라엘의 초대 왕)’과 온 이스라엘 백성의 간청을 거절합니다. 거절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버지 솔로몬보다 더 심한 노역과 세금부담을 주겠다고 말함으로 남북 이스라엘의 분열을 가져오게 됩니다.


3. 그리고 오늘 본문에는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솔로몬의 모습이 나옵니다. 11절입니다. ‘솔로몬’은 주변국가와의 정략결혼을 통해 무역과 국방에 큰 이득을 봤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애굽왕 바로의 딸’과 결혼한 것입니다.

성경에는 솔로몬의 아내 중 이스라엘 여인이 있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솔로몬의 후궁(700명)과 수청 드는 궁녀(300명)의 수는 상상을 초월합니다(왕상11:3). 심지어, 솔로몬의 왕위를 이은 ‘르호보암’의 친모는 ‘나아마’라는 이름의 ‘암몬 사람’였습니다(왕상14:21).

단순하게 ‘이방인과 결혼’했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이스라엘 여인 중에서 아내를 맞이할 수 있는 자유가 있습니다. 능력도 됩니다. 무엇보다 저렇게까지 과하게 ‘아내와 궁녀’를 둘 이유는 없습니다. 아무리 정략결혼을 통해 지켜지는 평화 혹은 나라의 안정이 중요해도 ‘여호와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믿음’이 있다면 저럴 수 없습니다. 선을 넘어도 한참 넘을 이유가 없습니다. (솔로몬에 대해서 냉정하게 바라보려면 적어도 ‘열왕기상 11장’의 기록을 봐야 합니다.)

내게 허락된 것들은 내 맘대로 사용해도 되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허락된 것, 가진 것, 누리는 것의 많고 적음의 문제가 아닙니다. 모든 주권을 하나님께 이양하며 산다면 뭐든 쉽게 결정할 수 없습니다. 결정과 판단의 과정이 까다로울 수밖에 없습니다.


4.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11절에 기록된 솔로몬의 모습이 ‘이중적’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으십니까? 이방인 아내를 ‘다윗성’에 두는 건 괜찮고, 자신이 직접 지은 ‘솔로몬 성전’과 그 성전 바로 곁에 있는 ‘신축 궁궐’에서 살게 하는 것은 안 됩니까?

‘여호와의 궤가 있는 솔로몬 성전은 특별히 구별된 곳이니까 이방인 아내는 안 된다.’라는 단순한 종교적 금기 사상에 빠지면 안 됩니다. 다윗도 ‘다윗성’ 곁에 ‘다윗의 장막’과 ‘여호와의 궤’를 두었습니다. 솔로몬도 ‘다윗성’에서 이방인 아내와 결혼하여 살았습니다. 적어도 20년, 왕으로 즉위하여 건축이 되는 동안 그곳에 살았습니다.

그런데, 왜 이제 와서 갑자기, “여호와의 궤가 이른 곳은 다 거룩함이니라”라고 말하면서 ‘바로의 딸’과 함께 자기가 건축한 왕궁에 살지 않으려 합니까?

성전 건물이 없어도 ‘여호와의 언약궤’의 본질은 동일합니다. 하나님께서 시내산 언약을 통해 그들과 맺으신 약속, 대속의 은혜, 말씀의 본질은 변하지 않습니다. 성전 이전 이후가 동일합니다.

11절을 가만히 보면서 “솔로몬은 ‘여호와의 궤’를 가지고, 자기 선택을 위한 핑계로 이용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경우에 따라, ‘이건 되고, 저건 안 되고…’, 내 마음에 따라 ‘그건 괜찮고, 이건 안 괜찮고…’ 대상에 따라 ‘어제까지 되던 것이, 오늘은 안 되는…’이런 식의 ‘자기중심적 선택을 위한 도구’로 ‘여호와의 궤, 성전 등’을 이용하고 있는 것인지 모릅니다.

결국, 장소의 문제보다 더 심각한 것은 ‘이방인 아내와 결혼한 솔로몬의 속마음, 본심’입니다. ‘성전을 건축하고, 왕이 되려는 솔로몬의 진심, 중심’이 더 중요합니다.

솔로몬에게 필요한 것은 ‘영혼의 솔직함’입니다. “바로의 딸과 결혼한 내가 문제였습니다. 정치 잘해서 큰 나라 만들고, 부강한 나라 만들어 보려고 주신 지혜를 잘못 사용했습니다. 하나님의 종으로 겸손히 나라를 다스리기보다 왕이 되어 ‘자아실현’하려했습니다.”라며 진실된 고백과 회개의 자리로 나갔어야 했습니다. 죄인을 가려주시고, 씻으시는 은혜를 붙들어야 했습니다.

제발 바라기는 12~13절에 기록된 ‘솔로몬의 종교 활동’이 ‘회개에 합당한 삶’과 함께 이루어진 것이기를 바랄 뿐입니다. 그가 드린 ‘번제의 제물’이 자신을 대신하여 드려지는 대속의 제물임을 믿고 드렸기를 바랄 뿐입니다.

오랜 종교생활의 익숙함이 나를 속일 때, 다시 십자가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사는 길입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날마다 새롭게 됨을 입으시길 축원합니다.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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