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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진Hyung Yun

10월 9일 2020년 금요일 묵상

본문: 고린도후서 11장 1~15절

1. 오늘 본문을 가만히 읽다 보면, 마음을 말이나 글로 다 표현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다시 느낍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본심, 자신을 통해 흘러가는 ‘고린도 교인들을 향한 예수님의 마음’을 정말 조심스럽게 표현합니다.

특히, 함께 대면하여 만났을 때 바울이 보여주었던 ‘유순함’을 오해한 ‘고린도 교인들’에게 ‘담대함’을 가지고 편지를 써야 했습니다. (고전10:1)

그래서 더 조심스러웠을 것입니다. 강약을 조절하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단어 선택 하나에도 신경을 썼을 것입니다. 쓰고 지우기가 거의 불가능한 상황이라 글자 하나 쓰기 위해 정말 고민했을 것입니다.

이런 것을 생각하며 읽어 나가면 사도 바울을 감동하신 성령님의 마음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말씀을 통해 나를 인도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이 보입니다.


2. 사도 바울은 11장을 시작하며 10장을 다시 요약하는 듯한 표현을 합니다. 그것이 1절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자신이 고린도 교인들과 함께 있을 때 보여준 ‘어리숙함(?)’에 대한 변명이 아닙니다.

“너희는 나의 좀 어리석은 것을 용납하라”라고 번역된 것을 원어의 뜻을 좀더 부각시켜 번역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너희들은 인내하라, 나와 함께 좀 어리석은 것 안에서.” (사실, 거의 직역에 가깝습니다.)

이 말의 참뜻은 “내가 나의 모든 것을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의 통제를 받은 것처럼 너희도 나와 함께 십자가에 통제를 받아야 한다. 그것이 멍청하고, 어리석고, 느리고, 둘러가는 것 같아도 그렇게 해야 한다. 함께 십자가 앞에 ‘제일 잘하는 것, 자신 있는 것, 받은 것들’을 내려놓자.”입니다.

오늘 본문 1절을 보는 순간 제대로 사도 바울의 편지를 읽고, 들은 ‘고린도 교회 성도’라면 떠올라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1:18)입니다!

참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의 능력’을 오해합니다. 십자가를 통한 ‘하나님의 해결 방법, 살리시는 방법, 회복의 방법’은 미련하게 보입니다. 세련된 것이 아닙니다. 최신 유행도 아닙니다. 있어 보이지 않습니다. 어쩌면… 이런 것들과 정확히 반대로 보입니다. 모자란 듯 보입니다. 답답하게 보일 수 있습니다. 뒤쳐진 듯 보입니다.

3. 뱀이 하와를 유혹할 때, 선악과가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게’ 보이도록 미혹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3절) 무엇이 ‘보암직이고, 먹음직인지’ 구체적으로 하나하나 말씀드리지 않아도 아마 아실 겁니다. 말씀을 내 심령에 가만히 비춰보면 보입니다.

특히, “그것만 생각하면, ‘나의 판단, 이성, 생각, 감정, 이성, 전인격’이 마비되는 것! 그것을 얻기 위해서는 성경 말씀조차 이용할 수 있는 것! 그것을 얻기 위해서 하나님의 능력을 빌어 오기 위해 죽을 것처럼 기도하는 것!”이 저와 여러분의 ‘보암직, 먹음직한 선악과’입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고대 그리스로마 문화가 그러했던 것처럼 당시 ‘철학, 윤리의 세련됨으로 포장된 종교성’에 속아넘어갔습니다.

처음에 십자가 복음에 반응했다가, 사도 바울이 떠난 뒤, 거짓교사들 속임수에 넘어갔습니다. 그렇게 ‘십자가 복음’을 잊었습니다.

이것은 ‘거짓 교사들’의 책임만이 아닙니다. 그들의 속임수에 반응한 ‘고린도 교인들’에게 더 큰 문제가 있습니다. 사람의 심령 깊은 곳에 도사리고 있는 ‘윤리성, 종교성’의 고상함이 자극 당한 것입니다. 그렇게 자기 의로움을 드러내기 위해 ‘십자가 복음’에 ‘종교적 행위’를 적당히 섞은 것을 택한 것입니다.


4. 사탄의 유혹을 가만히 보십시오. 사탄은 ‘하나님’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사탄이 부정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부정하게 만듭니다. (13~15절)

즉, “너는 죄인이 아니다. 너는 착하게 살고, 의롭게 살아서 인정받을 수 있는 괜찮은 존재야.”라고 말합니다. 좀 더 교묘하게는 “예수님을 믿지? 그래 그럼 됐어! 이젠 착하게 살면 돼. 뭐, 맨날 십자가야. 그냥 좋은 게 좋은 거니, 열심히 존경받는 삶을 살면 돼. 헌신도 열심히 하고, 가끔 십자가라는 말을 들으면 눈물 좀 흘리면 돼.”라고 속입니다.

사탄도 십자가를 압니다. 복음도 너무 잘 압니다. 사탄의 일꾼이라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전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보다 잘 설명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를 가지고 탁월한 설교, 감동적인 예화, 날카로운 신학도 구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한가지는 절대 안 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것’은 하지 않습니다.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과 함께 죽는 것’을 절대 택하지 않습니다.

혹시, 저처럼 ‘종교적 환경’에서 오래 지내고 계신 분이 계십니까? 그럴 수록 우리 함께 더 십자가 앞에 더 엎드려야 합니다. 윤리적이고 종교적 삶을 살수 밖에 없는 사람일 수록 ‘미련하고, 바보 같고, 아프고, 고통스런 십자가’에 우리의 심령, 전인격을 올려놓아야 합니다.

2절에 기록된 ‘하나님의 열심’은 ‘십자가’를 향합니다. 저와 여러분의 소원을 이뤄 주시기 위한 열심 혹은 열정이 아닙니다. ‘신랑 신부의 결혼’으로 표현된 ‘하나님과의 하나됨’은 십자가로 묶이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나의 손과 발을 올려놓음으로 하나되는 것을 말합니다.

아프지만, 살리시는 십자가의 능력이 저와 여러분의 삶과 가정에 흘러 넘치길 축원합니다.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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