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고린도후서 10장 1~18절
1. 오늘 본문인 고린도후서 10장은 다시 ‘자신이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과 이를 전하는 자신의 사도됨에 대한 변론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에 관한 매우 개인적인 특징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바울의 성격, 성향, 등’이 어떠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1절에서 바울은 자신의 성격에 대하여 스스로 말합니다. ‘유순하다’라고 표현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사도 바울’의 성격과 너무 다릅니다. 사도행전 15장 36~41장의 기록을 보면 ‘바나바’와 심히 다투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스데반을 비롯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죽이고 잡아 가두는 것에 열심을 낸 ‘바울’의 모습을 생각해보면 고개를 갸우뚱 할 수밖에 없습니다.
2. 바울은 원래 1절의 ‘담대한 나’였습니다. 거침없고, 당당하며, 자신감 넘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의 성향은 타인들에게 ‘교만하다’는 평가를 받았을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에게 완전히 통제되지 않고, 장악되지 않은 그의 성향에 ‘유대교 종교성, 도덕성’이 덧입혀지면서 자기 의로움이 폭발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유대교에 거슬리는 존재는 가혹하게 대했습니다. 날카로운 종교지식과 논리로 난도질을 하고, 그것을 근거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핍박했습니다.
그런, 그가 ‘유순한 사람’이 됐습니다. ‘유순하고’로 번역된 헬라어 ‘타페이노스(tapeinos)’는 ‘소심한, 자신감 없는(timid)’ 등으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무슨 의미일까요?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사람의 성격, 성향, 성품’ 따위가 바뀐 것을 의미할까요? 물론, 그렇게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1절을 가만히 보면 사도 바울은 자신이 때와 장소, 경우,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자신을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를 대면하면 유순하고… 떠나 있으면 담대한 나 바울…”이라고 말합니다.
한마디로 이것은 ‘통제됨’을 말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본성이 통제되고 있음 말합니다. ‘십자가에 붙들려 하나님의 온전한 도구’로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3.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을 대면하여 만날 때는 ‘유순한 모습’으로 그들을 대했습니다. 그러나, 떨어져 편지를 기록할 때는 단호하고, 명확하며, 선명하게 복음을 서술합니다. 때로는 따끔한 질타와 질책이 담겨있습니다.
사실, 10장의 서술도 가만히 읽어보면 단호함과 담대함, 엄중함이 서려 있습니다. 예를 들어 5~6절은 엄중한 경고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이라는 표현은 단순한 신학적 성경적 지식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의 은혜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에 관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가장 충만하신 예수님! 하나님의 선하심, 신실하심, 아름다운 그 구원의 지식의 결정체인 십자가!’를 바로 깨닫고, 알고, 믿는 것이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말 하나님을 안다면… 십자가의 참 진리를 안 다면… 전인격이 예수님에게 장악 당해야 합니다. 모든 것이 성령님의 통제 가운데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유형의 것이건, 무형의 것이건 상관없습니다. 작은 것 하나에도 하나님의 인도와 통제를 받기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묻고 또 물어야 합니다. 특히, 하나님이 주신 축복, 달란트라고 생각하는 것일 수록 더욱 그러해야 합니다.
4. 오늘 본문을 기록하는 사도 바울의 모습을 그려보려 애를 써봤습니다. 사도 바울, 그는 달변가였을까요? 그에게서는 소위 말하는 카리스마가 뿜어져 나왔을까요? 성경 기록을 바탕으로 짐작을 할 뿐 정확한 것을 알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비친 사도 바울의 외적인 모습(용모, 언변 등)은 그다지 긍정적이지 않았습니다. 7절의 “너희는 외모만 보는도다…”를 통해서도 얼마든지 알 수 있습니다.
당시 유창한 헬라의 웅변가들이 구사하던 화술, 달변, 지식 등에 익숙했던 고린도 교인들에게 ‘사도 바울’의 유순하다 싶을 만큼 단순한 말투와 볼품없는 그의 외모는 초라해 보였을 것입니다. 어쩌면 이런 식의 비웃음을 샀을 지 모릅니다. “저 사람은 항상 똑같은 말만 해. 십자가, ‘십자가에 달린 예수’만 이야기한다니까! 자기 철학이 없어. 최신 사상의 경향을 몰라. 뭔가 사람을 끄는 경쟁적 메시지가 부족해. 초보적 수준이야.”라고 비난했을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바울은 웅변 혹은 설교에 능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런 의문을 지울 수 없습니다. “바울은 정말, 원래, 천성적으로 말에 능하지 못했을까?”입니다.
아무래도 아닌 것 같습니다. 그는 탁월한 유대교 학자였습니다. 유대인의 회당에서 설교했습니다. 그의 유명한 설교 중 하나인 ‘아레오바고 설교’(행17장)는 말에 능숙하지 못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무엇보다 군중들이 스데반을 죽일 때, 그가 사람들이 돌로 치도록 선동(?)했습니다.
5.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사도 바울의 모든 것이 하나님에게 드려지고, 예수님에게 장악당하고, 성령님의 통제를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자신이 가진 지식, 논리, 언변 등 모든 것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장악당하고, 십자가에 붙들린 바 된 것입니다.
우리는 자꾸만 속습니다. ‘하나님이 주셨다. 하나님이 인도하셨다.’라는 자기 생각에 빠져, 그냥 휘둘러 댑니다. 무턱대고 ‘하나님께 쓰임 받는다. 영광을 위해서다.’라며 마구잡이로 판단하고, 결정하고, 사용합니다. (그러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영광, 인도, 쓰임 받음, 인도하심’이라고 믿는 것일 수록 더 조심해야 합니다. 죄악에 기울어진 인간 본성의 무서움을 알고, 더 엎드려 기도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변했습니다. 자신의 가장 장점 속에 숨은 ‘그 범위의 한계’를 알고, ‘분수 이상의 자랑’을 하지 않는 사람으로 변했습니다. (아니, 십자가에 붙들리니 그럴 수 밖에 없었습니다.)
13절의 기록을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누어 주신 ‘그 범위와 한계’를 따라 하노니…” 사도 바울의 마음 자세를 보십시오. 더 이상 말이 필요 없습니다.
무엇이 여러분에게 허락된 것입니까? 무엇이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축복이며, 달란트라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통제되지 않으면 가장 위험한 것’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바 되지 않으면 살리는 것이 아니라, 죽이는 것’이 될 수 있음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많이 길어졌지만, 이것은 말씀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17절은 ‘예레미야 9장 24절’의 인용입니다. 여기서 ‘나를 아는 것’은 ‘대속의 은혜를 통해 사랑과 정의, 공의를 행하시는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네, 우리의 유일한 자랑은 항상 똑같습니다. ‘십자가를 통해 죄인인 내가 구원받은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내가 죽은 것, 그렇게 다시 예수의 생명 얻는 내가 십자가의 통제를 받는 것 만큼 복되고, 기쁜 일이 없기를 축원합니다!
지민철 목사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