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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진Hyung Yun

10월 7일 2020년 수요일 묵상

본문: 고린도후서 9장 1~15절


1. 연보에 대한 마지막 설명 부분입니다. 굳이 두 부분으로 나눈다면, 1~5절은 예루살렘 교회를 돕는 연보에 참여할 것을 독려하는 내용입니다. 6~15절은 연보에 대한 마음 자세, 방법, 목적, 결과 등에 대한 부연 설명입니다.

특히, 12~15절에 기록처럼 고린도 교인들의 자원하는 연보는 비유대인 신자와 유대인 신자 사이의 연합과 이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영광이 연보의 목적과 결과라는 것을 분명히 합니다.

다른 사람을 섬기기 위한 ‘연보’의 유익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본문일 수록 조심해야 합니다.

성경적 관점에서 제대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며, 실천하기 위해서는 성령의 새롭게 하심에 의지하며 다시 본문에 집중해야 합니다. 처음보는 것처럼 말씀을 대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잘못 이해했고, 잘못 이해하기 쉬운 부분을 좀 짚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2~3절입니다. 이것은 ‘일 년 전부터 준비한 연보를 변심하지 말고 드리라’는 것이 아닙니다. 3절의 “우리의 자랑”은 ‘고린도 교회의 연보’가 1년 전부터 준비되었고, 그것이 곧 예루살렘 교회에 전달될 것을 자랑(?)한 것이 아닙니다. (물론, 그런 의미도 포함되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을 자랑하기 위한 내용만으로 볼 수 없습니다.)

2. 사도 바울의 자랑이 무엇입니까? 복음 전파자들의 자랑이 무엇입니까? 성도들의 자랑이 무엇 밖에 없습니까? 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그토록 끈질기던 내 자아가 죽은 것입니다. 그렇게 내 안에 예수님이 사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같은 것을 통해 당신의 살아 계심, 그 생명을 드러내시는 것만이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자랑’입니다!

‘자랑’으로 번역된 헬라어 ‘카우케마(kauchema)’는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자랑 혹은 자랑거리가 아닙니다. 원어적 의미를 부각시켜 굳이 번역한다면 ‘영광이 되는, 영광 돌릴 수 있는’입니다.

어제도 말씀드렸지만, 진정으로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영광 돌릴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떠난 죄인의 회개와 구원입니다. 그냥 회개와 구원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오직 삼위일체의 하나님만이 베푸실 수 있고, 이루실 수 있는 ‘십자가를 통한 구원’입니다.

사도 바울이 기록한 편지에서 ‘자랑’이 가장 잘 나타난 곳이 있습니다. 바로, ‘갈라디아서 6장 14절’입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입니다.

3. 고린도 교인들이 예루살렘 교회를 위해 드린 ‘거액의 연보’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 진정으로 ‘자랑’이 되는 것은 고린도 교인들의 거듭남입니다. 고린도 교인들의 회심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향한 고린도 교인들의 사랑과 열정입니다.

이런 소식이 없이, 십자가에 못 박힌 심령으로 하지 않는 연보가 예루살렘 교회에 전달된다면, 그것은 불우이웃돕기일 뿐입니다. 재난을 당한 사람들을 위한 성금일 뿐입니다.

그리고, 자칫 예루살렘 교인들의 마음을 상처를 줄 수도 있습니다. 사람의 의로움에서 시작된 도움은 극단적으로 말하면 ‘적선 혹은 동냥’ 수준에 머물 수 있습니다. 오히려 상대방을 부정적으로 길들이거나, 마음을 상하게 할 수 있습니다.

4. 또한 오늘 본문 중에서 가장 주의해야 할 것이 6절입니다. ‘적게 심으면 적게 거둔다. 많이 심으면 많이 거둔다.’ 이걸 글자 그대로 받아들이면 ‘공로신앙’됩니다. 자기 의로움과 노력으로 행하는 종교생활을 부추기게 됩니다. 더 심각한 것은 ‘기복신앙’으로 흐르기 딱 좋습니다. (은근슬쩍 그렇게 이용한 것도 사실입니다. 알고 그랬던 모르고 그랬던 말입니다.)

‘적게’라고 번역된 ‘페이도메노스(pheidomenos)’는 단순히 양의 많고 적음을 나타내는 말이 아닙니다. ‘절약하여’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적절합니다.

따라서 ‘절약하여 심는 자는 절약하여 거두고’라고 번역했다면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인색하게 드림으로 하나님께 복을 조금 받는다’라는 식으로 해석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어려운 중에도 알뜰살뜰 절약하여 드린 것도 하나님은 기뻐하신다’라는 의미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또한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에서 ‘많이’로 번역된 ‘유로기아(eulogia)’는 ‘축복(blessing), 찬양(praise)’라는 뜻입니다. 네, 이것 역시 ‘연보 액수의 많고 적음’이 아닙니다. 더 근본적으로 말하면 진정한 ‘유로기아(eulogia)’는 ‘예수 그리스도’뿐입니다.

사도 바울은 ‘연보’에 관하여 말을 하면서도 ‘십자가’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종교적 헌신, 섬김, 봉사 등을 강조한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좋은 말로 포장하고, 갖은 결과론적 열매를 강조해도 ‘십자가에 못 박힘’을 뺀다면, 그렇게 사람이 드러난다면 ‘거액의 연보’는 이웃돕기입니다. 심지어 ‘생명을 드리는 종교적 헌신’도 살신성인(殺身成仁)에 바탕한 지극한 도덕에 불과합니다.

십자가에 내가 못 박힘이 생명입니다! 십자가에 내가 못 박힘이 사랑입니다! 십자가에 내가 못 박힘이 능력입니다! 이 놀라운 십자가 사랑과 능력, 생명이 우리 삶에 넘치길 축원합니다.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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