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고린도후서 5장 11~21절
1. 고린도후서를 읽어가면서 감사함이 큽니다.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주일예배 때도 ‘고린도후서 4장 16~6장 2절’을 묵상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인지 말씀을 좀 더 선명하게 볼 수 있었습니다.
어쩌면, 제가 묵상을 나누지 않아도 성령께서 여러분의 마음을 감동하시고,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달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사도 바울은 누군가를 가르치기 위해 편지를 기록한 것이 아닙니다. 유대교라는 종교에 심취했을 때는 ‘가르치는 역할, 사명 등’을 감당 했을 지 모르지만,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생명’을 접한 이후에는 자신의 삶의 태도와 방향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십자가 복음이 가장 필요한 사람, 두려움과 떨림으로 매일 십자가 앞에 서야할 사람, 하나님과 화목케 하시는 십자가 은혜를 죽어도 붙들어야 할 사람이 자신이라는 것을 잊지 않았습니다.
만약, 누군가 말씀을 적용하는 방향이 외부를 향한다면, 타인을 향한다면 그 사람은 ‘복음에 반응한 성도’가 아니라, 그냥 ‘지식 전달하는 성경 강사’일 뿐입니다.
말씀을 나눈다는 것(설교 포함)은 ‘그 말씀에 이끌려 십자가에 못 박힌 나’를 고백하는 것입니다.
2. 오늘 본문을 보실 때도 ‘사도 바울’이 자신의 ‘사도 직분 혹은 전도자의 사명’에 대한 변호라는 생각을 잠시 내려놓아야 합니다.
특히, 12~13절이 주의가 필요합니다. 12절은 바울이 ‘고린도후서’를 기록한 목적을 한 마디로 정리한 것입니다. 자신이 고린도후서를 다시 기록하는 것이 자신을 변호하거나, 사도의 영적 권위를 세우기 위한 것이 아니라,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사도 바울을 통해 들은 십자가 복음에 대한 자긍심을 가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임을 분명히 하는 것입니다.
왜냐면, 너무 많은 공격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거짓교사를 비롯한 이런저런 종교인들과 주변 사람들의 비난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좀 속되게 표현한다면 “유대교 전통을 버린 십자가 복음이라는 건 거짓이다. 또 맞다고 해도 뭐 저런 별 볼일 없는 사람(사도 바울)에게 들은 것을 믿고 있느냐? 종교도 유행을 따른 거다. 맨날 십자가에 죽은 예수만 전한다고 뭐가 나오냐?” 등등 참 다양한 비난과 조롱을 들었습니다.
13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사도 바울’도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비롯한 ‘초대교회 모든 성도들’은 ‘미친 사람들, 한심한 사람들, 뭘 잘 모른 사람들’ 취급을 받았을 것입니다.
저는 바울의 이 표현을 읽고, 들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심령에 성령의 위로가 넘쳤을 것이라 확신합니다. 네, 14절의 ‘성령을 통해 강권하시는 그리스도의 사랑’에 감사 감격했을 것입니다.
3. 사도 바울의 말에 성령의 감동이 실린 이유가 있습니다. 진정한 위로가 되는 이유가 있습니다. 자신이 ‘새로운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17절) 옛 사람, 겉사람, 옛 자아는 십자가에서 죽었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은 예수님은 결국, ‘나를 위해 죽으셨음’을 철저히 인정하며, 다시 살리신 예수님을 위해 살 것을 결단했기 때문입니다. (14~16절) 아니, 결단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정말 체험했다면 ‘여전히 내가 살아있는 것이 지긋지긋해집니다. 다시 살아나는 자아를 죽이기 위해 예수님의 십자가를 향해 달려갑니다. 이런 영적 발버둥을 멈출 수 없게 됩니다. 이것이 진짜 성화의 삶입니다. 도덕적 개선 추구가 아니라, 십자가의 죽음을 기뻐하는 것이 성화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하나님과 범죄한 인간의 화목케 됨은 사람의 언어와 이성으로 표현도, 이해도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공부가 아니라, 연구가 아니라, 엎드림 밖에 없습니다. 엎드리는 마음조차 하나님이 주신 줄 믿고 전인격을 발가벗겨 납작 엎드려야 합니다.
낮은 마음으로 성경을 읽으십시오. 십자가를 붙들고 말씀을 대하십시오. 십자가 보혈에 마음을 씻으며 하나님 말씀을 묵상하십시오.
십자가에 못 박힌 심령으로 말씀을 대하는 성도에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롭게 됨’을 풍성히 주실 줄 믿습니다.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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