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출애굽기 39장 1~21절
1. 성막과 관련된 모든 물품의 제작은 제사장들이 착용할 옷을 만드는 것으로 마무리 됩니다. 그리고, 출애굽기는 ‘성막 봉헌’을 위한 제사로 마무리됩니다.
제사장, 그 중에서도 ‘대제사장(아론)’이 입는 옷은 말 그대로 화려했습니다. 2~5절의 ‘에봇’이 그렇습니다. ‘에봇(ephod)’은 ‘앞치마’같은 옷입니다. 겉옷 위에 아름답고, 화려하게 수놓은 ‘앞치마’ 혹은 ‘조끼’같은 것을 덧입었다고 보시면 됩니다.
그리고 ‘에봇’ 위에 12개의 각종 보석을 물려 만든 ‘흉패’를 붙였습니다(6~21절). 이 보석들은 ‘이스라엘 아들들(12지파)’를 상징하는 것입니다(6~7절).
그렇다면, 대제사장의 옷을 통해 드러나는 아름다움, 화려함, 정교함이 무엇을 의미할까요? 당연히 ‘하나님의 영광과 존귀’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덧입은 이스라엘의 영광스러움 입니다. 거룩한 족속, 왕 같은 제사장으로 선택된 영적 이스라엘인 저와 여러분이 덧입은 ‘하나님의 은혜와 영광’을 상징합니다.
그러나, 절대 잊어서는 안 되는 ‘옷의 본질’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 옷을 입기 전에 어떤 일이 있었는가를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결국 그 화려한 옷을 벗어야 한다는 것을 가슴에 새겨야 합니다. (출애굽기 28~29장을 함께 나눌 때 말씀드렸습니다. 수요예배 때 좀 더 깊이 나눴습니다.)
2. ‘옷의 본질’은 ‘가리는 것’입니다. ‘드러나면 부끄러운 그것, 보여 지면 수치스러운 그것’을 가려주고, 덮어주는 것이 ‘옷’입니다.
아무리 화려하고, 정교하고, 고급스럽게 꾸며진 옷이라도 망사처럼 얼기설기 엮여져 내 속이 훤히 보이는 옷은 부끄러움과 수치를 가릴 수 없습니다.
세상의 것, 육신의 것들은 그저 이런 수준입니다. 화려함과 고급스러움으로 잠시 남의 시선과 마음이 빼앗길 수 있지만, 이내 나의 본 모습, 본질, 본성, 죄성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하나님의 눈은 더더욱 피할 수 없습니다.
3. 이런 인간을 위해 하나님께서 처음 하나님께서 처음으로 지어 주신 옷을 묵상해 봅니다(창세기 3장).
‘범죄한 인간, 서로의 수치, 서로의 범죄한 모습을 바라보며 어쩔 줄 몰라 하는 인간은 ‘무화과 잎’으로 부끄러움을 가리려 했습니다(창3:7).
참 똑똑하고, 번뜩이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내 시들었습니다. 말라서 시들어가는 ‘나뭇잎’을 보며 전전긍긍합니다. 또 다른 나뭇잎, 그럴 싸한 나뭇잎을 찾아 헤매고 다닙니다.
인간이 스스로 만든 종교와 세상의 것들로 자신을 감추고 가리려 했던 것은 ‘나뭇잎’입니다. 허망하게 시들어 버리는 ‘나뭇잎’입니다.
이렇게 허망함 위해 남은 육신의 생명을 허비하는 인간들 앞에 하나님은 ‘가죽 옷’을 지어 오셨습니다(창3:21). 절대 시들어 말라버리지 않는 ‘가죽옷’, 부끄러움을 영원히 가릴 수 있는 ‘가죽옷’을 들고 오셨습니다.
4. 그리고, ‘가죽옷’, 짐승의 가죽을 얻기 위해 한가지 꼭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 동물을 죽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손에 피를 묻히셔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싫어 버린 인간, 범죄타락한 인간의 수치를 가려주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친히 짐승을 잡으셨습니다.
결코 잊어서는 안 됩니다. 범죄한 인간이 먼저 죽었어야 했는데, 인간(아담과 하와)보다 먼저 죽은 짐승이 있었다는 영적 진리를 놓쳐서는 안 됩니다.
이것이 ‘십자가에서 범죄한 나 대신 죽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가장 먼저 예표하는 사건입니다.
5. 본문으로 돌아옵니다. 그 아름답고, 화려하고, 정교한 옷을 입기 전에 제사장을 구별하는 제사를 드렸습니다(출29장). 이런 내용을 ‘위임식’이라는 거창한 종교적 표현을 쓰니까 진정한 영적 의미를 잊어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결국 그 화려한 ‘에봇’은 다 벗어야 합니다. 일년에 한 번 ‘지성소’로 들어갈 때, 하나님을 만나러 갈 때 화려한 옷은 다 벗습니다.
그저, 정결함의 상징, 가려주심의 상징인 흰 세마포 옷, 속옷만 입고 ‘지성소’로 들어갑니다. 그 손에 들린 것은 어린 양의 피밖에 없습니다.
6. 우리 얼마나 많은 것을 덧입기 위해 이 땅의 삶을 살았습니까? 심지어 ‘하나님의 이름과 영광, 축복’으로 포장된 얼마나 많은 것을 덕지덕지 입고 살았습니까? (부정적으로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것들 결국에는 다 벗어야 할 ‘에봇’입니다.)
이런 생각을 해봤습니다. 밤에 자기 전에 잠옷 바람으로 엄마 아빠의 품에 안긴 어린 아이를 생각해 봤습니다. (안 씻고, 잠옷 안 입고, 엄마 아빠 침대에 오면 혼납니다~~)
마지막에 하나님 품에 안길 때,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옷 입은 것 외에 아무것도 입을 수 없고, 가져갈 수 없습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이뤘다고 생각하는 것들조차 다 내려놓아야 합니다.
성막(증거막)의 완성을 바라보며, 종교심에 불타는 뿌듯함 보다 예수님께서 완성하신 십자가 대속의 은혜에 가려진 바 되어 하나님의 품에 안긴 영혼의 잔잔함이 우리 안에 흐르길 기도합니다.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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