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출애굽기 34장 1~17절
1. 출애굽기 34장은 하나님께서 ‘두번째 돌판’을 주신 기록입니다. ‘금송아지 사건’으로 ‘첫번째 돌판’이 깨졌습니다. (유명 영화의 장면이 떠오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께서는 두번째 ‘돌판(증거판)’을 주십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다시 언약을 세우신다는 뜻입니다. 계약서를 다시 쓰시는 것입니다. 인간이 파기한 계약을 하나님께서 다시 갱신하시는 것입니다. 파기한 인간의 어떠함과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다시 언약을 맺으신 것입니다.
출애굽의 역사에서 ‘언약의 갱신’을 ‘신명기’로 생각하지만, 사실은 여기서 이미 ‘언약의 갱신’이 있었습니다.
더 넓게 말하면 성경 전체는 언약을 다시 세워 가시는 하나님의 신실함, 사랑, 은혜의 역사입니다. (여기서 신학적인 설명이 어렵지만, 조금 말씀 드리겠습니다.)
2. 하나님께서 인간(아담)과 맺은 최초의 언약은 ‘행위언약’이었습니다. 이 언약에 따라 완전하고 자발적인 순종을 조건으로 아담과 아담의 후손(인간)에게 영원한 생명이 약속되었습니다. 그러나 ‘선악과 사건’으로 말미암아 아담(인간) 스스로 하나님을 싫어 버렸습니다. 하나님이 아닌 자신이 주인 된 삶을 살기 위해 ‘행위 언약’을 파기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을 내버려 두지 않으셨습니다. 더 나은 언약, 더 완전한 언약, 더 은혜로운 언약을 예비하셨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기쁘신 뜻대로 제 2의 언약인 ‘십자가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따라서, 성경 속에 나타난 모든 언약(아브라함 언약, 시내산 언약, 다윗 언약 등)들은 ‘십자가 언약’을 향하는 예표입니다.
3. ‘금송아지 사건’이라는 끔찍한 옛일을 뒤로하고 ‘새로운 언약, 두번째 돌판’을 주신 이야기 속에서 하나님의 성품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 사용하는 그 어떤 단어로도 표현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입니다. ‘모세’라는 성경의 인물이 부러운 이유가 이것입니다. 홍해를 가른 위대한 지도자로 쓰임 받은 것이 부러운 것이 아니라, 이 놀라운 ‘새 언약’을 가장 먼저 체험하고 붙든 사람이라는 것이 그저 부러울 뿐입니다.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우리도 부러움을 살 수 있습니다. 모세가 두번째 언약을 받으며 믿음으로 바라본 언약의 최종 완성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음으로 붙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10절의 “내가 아직 온 땅 아무 국민에게도 행하지 아니한 이적… 여호와의 행하심…내가 너를 위해 행할 일이 두려운 것임이니라”를 표면적으로 이해하면 안 됩니다. ‘가나안 정복과 그 과정에서 일어날 초자연적 현상, 기적의 승리 등’을 오염된 인간의 생각, 땅의 가치에 뿌리박은 개념으로 이해하면 안 됩니다.
4. 하나님의 약속, 그 언약의 신실함 안에서 묵상해보십시오. 선택 받았다는 이스라엘 백성은 청개구리처럼 11~17절에 기록된 하지 말라는 짓을 골라서 합니다. 언약을 계속 파기합니다.
결국 그들은 언약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아니, 하나님께서 언약을 주신 핵심은 놓치고 땅의 것들을 얻기 위해 ‘눈 가리고 아웅’하는 식으로 겉으로만 복종, 맹종, 맹신하는 수준에 머물렀습니다.
그러나, 그 언약을 완전하게 지키신 분이 있습니다. 언약을 완성하신 분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언약을 세우신 분도 하나님, 언약을 지키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을 생각하면, 이 사실을 깊이 묵상하면, 이 진리가 실제로 다가온다면… 어설픈 인간의 윤리와 의로움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알게 됩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는, 아니 하기 싫어하는 인간의 간악함에 심령을 찢게 됩니다.
그래서 두번째 언약, 은혜언약,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언약을 붙들 수 밖에 없게 됩니다. 그것을 붙든 자들의 삶은 행위를 위한 삶이 아니라, 내가 죽은 그 자리에서 나 대신 하나님의 법을 지키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인하여 살아가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위해 살게 됩니다.
다시한번 강조 드립니다. 진정한 하나님의 영광은 초자연적 현상 혹은 인간의 개념 속에 최고라고 생각하는 것들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두번째 언약, 은혜 언약, 십자가 언약’으로 우리를 덮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 은혜로 영원히 죽을 자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다시 허락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십자가 아래에 꿇어 엎드린 우리, 십자가 은혜 사이에 숨겨진 바 된 우리(출33:18~23)를 만지시는 은혜가 넘치길 축원합니다.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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